Tuesday, April 24, 2007
To finish my story
하루가 시작된 때는 10시가 조금 넘어선 시각이었다.
어제의 막내녀석 골방 도배가 모두 끝나고..그곳에 있던 창고 비슷한 것을
분해 조립해 새로운 형태의 모양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것은 어찌보면
내 몸에 덕지 덕지 붙어있던 습관들을 해체해가는 작업과 비슷했다.
어머님께서는 오늘 모두 끝내자며 손수 무거운 장독들과 물건들을 나르고
계셨다. 그래도 큰녀석이란 계급의식이 발동해 골다공증 이라는 이유를 대
며 그 무겁던 장독들 - 사실 이 시대에 그것도 서울에서 숯을 띄운 장독을
가진 집은 그리 흔치 않다 - 을 모두 옮겼다. 군에 갔다왔다는 미묘한
자긍심은 어쩔 수 없는 현실 인식을 동반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
모든 집안일을 끝마치고 그 지저분 하던 창고에서 아직도 풀 냄새가 나는 이
쁜 골방으로 변신을 한 구석에 앉아 가만히 지난날을 되짚어 보았다.
아버지의 파격적인 인격의 변신과 어머님의 고난, 그것은 극히 작은 부분
부터 시작 되었었는데. 그 와중에도 선험적 지적 사모함은 소진되지 않고
우리 새끼- 아버지...당신 세대에선 자식들을 그렇게 애끓게 호칭하신다-들
은 참으로 착하고 죄짓지 못하고 살았다. 사실 난 이것도 참으로 마음이 아픈
것으로 생각한다. 주변의 모든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
도 하며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낼 때 우
리는 고요히 지금의 시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 부속 여중을 다니던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은 누님은 흑석동까
지 가야할 버스 회수권 구입할 때가 될 때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마음을
졸이다 겨우 한장에 60원하던 회수권 몇 권 구입할 용돈을 타가곤 했다. 그녀의
가녀린 손으로 콩자반을 만들어 누런 양은 도시락에 채우고, 마치 그녀의 눈
물로 만들어진 세월을 채우듯이.
당시 난 초등학교 2학년의 내성적이고 다혈질의 장남 카리스마였다. 밑으로
4살씩 터울이 진 아장 아장 걸어다니던 막내와 둘째 녀석이 있었다. 하루는
사당 2동의 소위 우리집에서 다락을 치워-사실 그곳은 치워도 쥐이와 벼룩
이 많이 덤벼들었다- 누나의 방을 만들어 주었다. 누나는 그 또래에 비해
꽤 큰 키였기에 -160정도였을거다- 허리를 굽혀야 겨우 다닐 수 있는 그 다
락방이 힘겨웠을 거다. 하지만 온 가족이 한 우리에 뒤엉켜 잠을 자야 했던
당시로써는 그녀만의 다락방 이라는것 때문에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다락방은 그녀에게 소녀의 감수성과 꿈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 14인치
미닫이 흑백 텔레비젼에서 방송되던 캔디를 볼 때마다 그녀는 눈가에 눈물
을 가득히 담고 있곤 했다. 아마...그녀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대문밖엔 넓은 공터가 있어서..둘째 녀석은 콧물을 소매로 핥아내며 열심히
구슬-다마 치기 라고도 했었다- 따먹기를 해 한아름 안고서는 마치 자기의
보물인양 좋아하곤 했다. 장남이고 상상속에서 살던 나는 그런것이 하찮게 보였
고 그 자식이 그걸 전유물처럼 자랑 할 때마다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을 만
큼만 패주곤 했다. 어느날은 둘째와-사실 우리는 공모자며 콤비라고 자부하
곤 했다.- 귤이 너무나 먹고 싶어 근처 진열된 과일 가게를 지나치며 몇개
씩 주머니에 슬쩍 훔쳐 넣곤 했는데.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이 참말임을 그때
깨달았다. 콧 때가 줄줄 흐르는 두 녀석이 몇번이고 과일 진열대에 근접해서
지나치는 지라..곰보 주인녀석이 눈치를 챗는지..우리 두 형제의 머리카락
을 힘껏 쥐고 잡아 들어갔다. 가는 도중 발로 차이기도 하면서 - 우리나라
엔 개인의 인격과 인권을 보장해주는 장치가 있지만 그건 유명무실한 것이
었다. 우리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없을 만큼 차이고 패대기면서 거짓 자백
까지 했다. 전에도 몇번의 범죄 사실이 있었다고 말이다.
그 때 나는 곰보들의 열등감이 얼마나 크며 그 외적 표출은 살인을 할 수도
있을 만큼 사디즘적이고 마조히즘적 이라는 진리를 깨우칠 수 있었다.
난 이세상에서 곰보가 가장 무섭고 두려운 존재이다.
우리는 그래도 양심이 있었는지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그리고 집 주소를 그 곰
보에게 끝까지 자백하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썼지만...그 곰보는 세상물 다
먹은 녀석이라..나와 어린 둘째녀석을 분리해 대질 심문을 했다. 기어이 6시간
이 지난 밤 8시에나 누나가 하얀 얼굴로 우리를 찿아왔다. 그 시간에도 아
버지는 일당 노동일을 하고 있었고..어머니는 시장에서 꼬추 말린것을
팔고 있었다.
그래도 부모 덕을 많이 본지라..나나 누나의 얼굴이 통통하고 하얗고 귀티나
게 생겨 보였는지 그 곰보놈은 주황색 귤 3개 훔친것을 초범이 아니었다며
과장을 하더니..기어이..그녀의 가녀린 손에서 5천원이란 큰 돈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일주일이 흐른후 그녀는 어머니께 머리채를 잡히며 몇시간이나..맞아야 했
다. " 이 썩을 년아...그래..니 애미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더냐..응,,참고
서 산다고 하드니만..그 참고서좀 내놔봐..아야..이 썩을년아.."
내 안에있던 곰보에 대한 두려움은 심연의 곳곳에 또아리 틀고 있었다.
그것은 내 삶의 경로마다 나를 사로잡는 상흔의 근원처럼 행세하곤 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성경에도 곰보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마음의 곰보...심령의 곰보...영혼의 곰보에 대해서 말이다.
어른으로 성장해 오면서 곰보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하신 후 부터 또 다시 곰보에 대한
두려움들을 새롭게 부각 시키고 계셨다.
내 주위에는 외적인 곰보가 없었지만 어느날 부터인가 곰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내 안의 녀석은 이미 곰보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그 안에는 냄새나는 미움과 시기, 두려움,
음란함, 게으름 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무서웠다.
곰보에 대한 두려움이 왜 사라지지 않는가라는 의문에 일침이 가해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내 안에 이미 곰보를 안고 살아 왔으니 말이다. 곰보는 먼곳에
있지 않고 이미 내 안에 있었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성령의 치유하심으로 내 영혼의 곰보 구멍에 있던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빼내어 소제하기 시작했다.
기도로 빼내어진 자리에는 더욱더 선명한 곰보 구멍이 생겨났다. 아팠다.
슬펐다. 내 영혼의 얼굴은 선명한 구멍이 뻥뻥 뚫린 곰보였다.
너무도 오랜동안 곰보구멍에 채워져 있던 것들이 난 곰보가 아닌듯 착각하게
했다. 그 구멍을 가리고 있던 맨질한 얼굴에 세상의 화장을 했다.
이기와 시기, 미움과 게으름, 음란함과 세상 학문, 외적인 기준...
놀라운것은 그 구멍이 숭숭 들어나도록 기도와 성령으로 청소를 했지만
이내 그 자리엔 더욱더 단단하고 빼어내기 힘든 것들로 채워져 버리곤 했다.
영혼의 곰보는 육체적 곰보보다 더 끔찍했다.
내 영혼에 선명하고 깊게 패인 그 곰보 구멍에 이젠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다른것들이 더욱 견고하게 채워지지 않도록 난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누나의 영혼에는 너무도 서러운 곰보 자리가 많다. 어머님 영혼에는 더 큰
영혼의 곰보 구멍이 있었다.
이제 주위에는 눈에 보이는 곰보들이 아닌...마음의 곰보들이 너무도 많다
난 그들의 그 빈자리에 무엇을 채워 주어야 할 지 알고 있다.
그들에게 가르쳐 주리라..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그 곰보 구멍, 그 열등감,
낮은 자존감의 구멍을 채울 수 없다고 말이다.
靑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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