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y 1, 1996

익숙해진 슬픔

 
황토빛 목장 숲을 지나가면 그곳엔 이슬들의 아침이 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까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마음들일 것이다.

주머니 속에 담아둔 전화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메아리쳐 온다.

나...결혼해...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차 안에선 담배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는

동료들을 가끔 태워준 덕분이라고 웃어넘기며 그녀는 머리칼을 쓸어넘긴다.

하얀 목덜미가 예전보다 더 희게 보인다.

목장을 경계지우고 있는 희나리 등걸 나무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이는

날이다.

매니큐어를 하지 않은 잘 손질된 그녀의 손끝에 카셋트 테잎이 밀려들어간다.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왜 죽은 사람 노래를 듣냐는 질문에 그녀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서 좋다고

한다.

삼십대가 되니 마음이 많이 불안하고 그래.. 음..아이가 크면서

왜 엄마는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아 라고 질문하면 무어라 말해 주어야할지

막막해지는 꿈을 꾸곤 한다고 그녀는 작은 입술을 약간 오무리며 말한다.

훈훈해진 오후의 열기 때문인지 녹기 시작한 질펀한 목장 길목으로

경운기가 털털 거리며 힘겹게 지나간다.

47번 국도를 따라 일동까지 나가 그곳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녀는 마감을 앞두고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전화를

한다. 사무적으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녀가 프라이드를 사고 그것을 몸에 익숙하게 익히는 동안

훈련소에서 받아본 그녀의 또박 또박한 글 들은 이별에 대한 짧은

감흥들이었다. 아마도 그땐 정말로 이별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그녀는 연신 울음을 그치지 못했었다.

우리가 만난지 4년이 흐른 그해 겨울. 제대를 보름 남겨두고

그녀는 동료기자와 결혼을 했다.

그 남자는 그녀보다 2살 연하였다.

가끔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 보다가 두툼하게 쌓여있는

눈덩이 들을 발견하곤 이것이 무엇일까 들쳐보기를 했다.

시간의 열기가 녹여버렸다고 확신하던 옛 기억들이 아직도 쌓여있는것을

보곤 흠칫 놀라곤 했다. 남들이 이야기 하는 사랑의 흔적일까...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익숙해진 슬픔이라는 것이었다.

익숙해진 슬픔..





                         靑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