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0, 1995

소나기

 
후두둑 후두둑.

조립식 막사의 양철 지붕을 깨우는 여름날의 외침.

아직 대낮인데도 깜깜한 오후다. 식당에서 구보로 뛰어 왔지만 이미 젖을데로 젖어

등짝에 착 달라붙는 전투복이 부담스럽다. 빗속에서의 소란했던 빗방울들이 물감을

흠뻑 먹은듯 다채롭게 보인다.

후두둑 후두둑 메트로놈 진동에서 음률로 변조된다.

식물들 사위로 진한 녹색 단조가. 희나리 등걸에 핀 버섯에선 북소리가. 그리고 유

리창을 때리는 아프페지오와 화성을 이루는 붉은 대지의 안정감. 빗방울과 호흡하는

모든 세계가 교향악을 연주하고 있다. 살풀이라도 하듯 세차게 토해내는 취한 하늘

아래 몇몇의 감상객이 있을까 자못 궁금해 지기도 한다.

12시 30분. 하절기라 1시까지 내무반에 누워 오침중이다.

아홉살 때 였던가. 장마철 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무슨 기념일이라 아침부터

14인치 흑백 TV 앞에서 진을치고 앉아 있었다.

스물 네 해의 감성을 이룬, 황순원 님의 '소나기'가 TV 문학관

타이틀로 방영되었다.

개울가에서 물을 움키며 장난을 치던 소녀. '바보' 라는 한 마디와 조약돌을 뒤로

하고 이유도 없이 내달음치던 소년. 무릎에 생긴 생채기를 보듬던 순수. 맑고 푸른

하늘. 단조로운 흑백의 조화였지만 쏟아붓던 그 굵은 소년의 소나기가 창밖에서도

내렸었다. 소녀가 앓을 때 난 소년이 돼 버렸고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이후 칼라

TV 로 바뀐 후 두번인가 더 보았는데. 두번째 부터는 왠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수염이 한두가닥 자랄 시기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막사 밖에선 굵디 굵은 순수가 곤두박질치며 노래하고 있다.





                          靑潭

Monday, April 24, 1995

품어내기

낮아지고 작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랑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

사랑이 시들고 미움과 슬픔의 뿌리가 뻗은후
사랑의 고갱이는 붉은 열매를 맺는다.

그 기억의 변증법들은 깊이 깊이 묵혀서
시고 떫음을 지나쳐 본체의 맛과 향이

절로 피어날 때 꺼내야만 한다.
우리는 판도라의 어리석음이다.

어린시절의 취미였다고나 할까. 다른 아이들처럼 골목에서 떠들썩하게
딱지 치기를 하거나 구슬 치기, 땅따먹기를 하기 싫어했다. 어린 눈에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 싫었다. 신문
지나 마분지를 접어 만든 사각형의 딱지에 소유의 즐거움과 착취의

쾌락을 그리고 승부의 본능을 부여해 놀이 하는 것이 영 흥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자치기나 연 날리기, 불장난을 주요 놀이로 삼았다. 그것은
주로 겨울철 놀이였다. 옆집 지붕에 한 뼘 만큼 쌓인 하얀 눈에서 일

요일의 태양을 맞이하고 담요안에 훈훈한 화석 연료의 생기가 가득할
때의 나른함을 좋아했다.

낮엔 깨끗한 사발에 모래를 씻어넣고 동생 녀석의 1호 재산인 유리구
슬 몇 개를 놓는다. 그리고 팔당호에서 공수되온 수돗물을 부어 고요

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골목 녀석들의 엄지와 중지 사이에서 사정없이
던져져 부딪히고 깨지고 상처입어 탁해진 밉살스런 유리알들이 물속

에 넣어지면 깨끗이 아물었다. 그것은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처럼
투명하고 순수함의 절정이었다.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하지만 너그

러움과 그 맑음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누나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되돌아 보니 구슬이 온데 간데 없다. 물과 모래 뿐이

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는 제자리에 있었다. 그는 물보다 유연했
고 빛과 같기도 했다. 내 마음이 희어지고 희어져서 빛이 되면 구슬이

보이고 나쁜 마음을 먹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라 믿었다.
인간의 본능인지 순결의 절정을 보면 교활한 호기심이 동하나 보다.

손을 넣어 눈 앞에 꺼내어 보니 투박한 유리일 뿐이었다. 가슴이 아리
고 슬펐다. 치유와 평화의 끝에 이른 그것을 망가뜨린 자책이었다. 한

편으로 영악한 아이의 눈에 비친 그 현상이 신기한 의문으로 남았다.
물속에 담겨진 유리알의 영롱함이나, 꺼내졌을 때의 그 참담함과 현실

적인 슬픔이라니. 구슬의 모양을 그대로 품으며 순수를 살려내는 물의
너그러움이 내 안에도 있을까 하는 궁금이 있었다.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형태에 흡수되기도 하며 포용하기도 하는, 유리알을 부끄럼 없이
물이 되게하는 그 유연한 모성(母性)이 평화의 궁극이었다. 그리고 그

순리의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이 치유의 정도(正道)임을 깨닫게 했다.
한가지 불변의 고집 이라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방향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보다 큰 포용을 위한 낮아지기였으며 작아짐의 변
증법이었다.

잣나무 침엽 끝에 맺힌 아침 이슬을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뒤에 있던 거대한 산과 하늘이 그 작음속에 들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젠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靑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