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11, 2016

사랑 한판 (8월10일 한국일보 칼럼)

아이가 넷인 아내와 나는,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더군다나 딸 아이여서 더 애지중지 했었다. 아내와 나는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넘치도록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 첫째 아이에게 특별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놀아주고 관심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막 태어난 아기를 안고 기쁨을 표현할 때마다 자신이 받을 사랑과 관심을 빼앗긴듯 상실감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첫째의 모습은 아직도 가족 사진 몇장에 남아있다.

우리는 첫째 아이에게 백퍼센트(100%) 보다 더 넘치듯 관심과 사랑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가 사랑으로 배가 부르고 만족한 상태로 둘째 동생과 지낼 것으로 생각했었다. 다시 말해서, 첫째 아이에게 반절(50%) 둘째 아이에게 반절(50%)씩 부모의 사랑을 표현하고 돌봐주면 될것이라 착각을 한 샘이다. 그 결과, 첫째 아이는 이전과 동일하게 백퍼센트 사랑과 관심 받기를 여전히 원하고 있고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다양한 반동(Reaction)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와 이 상황을 놓고 함께 기도한 후, 말 못하는 갓난 아기인 둘째에게 해야할 일을 마치면 아내와 내가 번갈아 가며 짧더라도 매우 질높은 시간(Quality Time)을 첫째 아이와 갖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첫째는 자신에게 부모가 온전한 관심과 사랑을 여전히 흘려 보내주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기 시작했다. 아이 사랑하기가 반절(50%)이 아닌 백퍼센트(100%)에 가까워진 것이다.

셋째, 넷째 아이까지 합류하면서 25%씩 쪼개어 네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짧더라도 질높은 시간(Quality Time)을 네 아이와 따로 따로 가짐으로 백퍼센트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런 시도는 아이들 하나 하나가 자신에게 네등분된 것중 한 조각의 사랑을 먹고 배고파하는 것이 아닌 온전한 사랑 한판을 먹고 만족하게 되는 열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랑 한판(100%)을 추구하고 요구하는 것은 비단 아이들 뿐만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예컨데, 결혼한지 얼마 안된 젊은 부부들이 겪는 가장 큰 갈등중 하나가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할 것인가다. 더군다나 요즘엔 결혼해서도 여전히 부모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세대가 많아서 그 갈등은 종종 이혼까지 이르곤 한다.

이런 갈등을 해결할 방편으로, 이제 막 가정을 이루어 함께 살기 시작한 배우자에게 반절(50%) 그리고 부모님께 반절(50%)씩 시간과 돈 그리고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이것은 온전한 사랑 한판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 사람에게 잘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배우자 뿐만아니라 부모님도 동시에 반절(50%)의 결핍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결혼해 함께 살고 있는 배우자가 백퍼센트 사랑과 관심을 높은 순도와 질로 (Quality Time)  서로에게 표현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짧은 시간이라도 깊은 내적 대화와 서로를 이해하고 동감하며 함께 서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질 높은 사랑 한판을 먼저 배우자에게 공급해야만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내에게 백퍼센트 그리고 남편에게 서로 공급된 백퍼센트 사랑이 합쳐지면 부부 총합 이백퍼센트가 아닌, 백퍼센트 사랑 한판이 만들어진다. 이 사랑을 부모님께 흘려 보낼 때 비로소 부모님도 백퍼센트 사랑 한판을 받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랑 산술(Math of Love) 이다. 사랑 산술(算術)에서는 사랑 한조각 더하기 다른 한조각은 한조각이 되며, 사랑 한판 (100%)더하기 다른 한판(100%)을 해야만 한판의 결과가 나온다.

이런 사랑 산술은 교회 공동체, 가족 공동체, 그리고 사람이 모여있는 모든 공동체에 동일 하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사랑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죄로인해 그 사랑의 공급처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후 다른 곳에서 그 사랑을 취하려고 했지만 결코 온전한 사랑을 취할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신것이다 (요 3:16). 환언하면, 하나님이 사랑 한판을 인간에게 온전하게 주신것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 한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퍼센트 자신을 내어주어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다시한번 인간 각 사람이 온전한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된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 한판을 온전히 취하고 날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와 자녀들 가족 그리고 가까운 이웃과 세상에 사랑 한판씩 온전하게 나누며 사는 삶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시도해보라, 놀라운 열매를 보게될 것이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 링크: 
http://chicagokoreatimes.com/%EB%AA%A9%ED%9A%8C%EB%8B%A8%EC%83%81-%EC%82%AC%EB%9E%91-%ED%95%9C%ED%8C%90/

Tuesday, August 2, 2016

말의 힘 (8월 3일 한국일보 칼럼)


사람의 귀가 소리로 인식할 수 있는 가청 주파수는 20 에서 2만 헤르츠(Hz) 사이다. 물질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는데 그 진동이 가청 주파수의 진동 수를 유지하며 공기를 가로질러 인간의 귀에 이르러 고막을 진동시키고 그것이 뇌에 전달되어 소리로 인식하게 된다.

가청 주파수 영역외의 것을 저주파 또는 고주파라고 한다. 고주파의 영역을 우리 일상에서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것이 바로, 전자레인지(Microwave)와 핸드폰(Cell phone)이다. 전자레인지는 약 2.45 기가 헤르츠(GHz) 진동하는 소리(주파수)를 쓰며, 핸드폰은 800 메가 헤르츠 (MHz)와 1900 메가 헤르츠(MHz) 사이의 소리(극초단파)를 사용한다.

전자레인지(Microwave)에 닭(Chicken)을 넣고 작동 시키면 강력한 극초단파(Microwave)가 닭의 물분자를 진동시키는 힘으로 열을 발생시켜 조리가 되게 만든다. 잘못 다루면 심지어 화재가 나거나 폭발할 수도 있는 힘이 전자레인지에 있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전자레인지(Microwave)와는 진동수만 차이가 날뿐 본질 자체가 똑같은 소리인 사람의 말도 힘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의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다. 예컨데, 잠언 18장 20절과 21절은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경고하며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힘(power)이 인간의 말에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잠언 13장 2절은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하며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인생의 복락을 좌지우지 함을 보여준다.

야고보서 3장은 사람 말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림처럼 보여준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거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야고보서 3:4-6).

전자레인지 안에 장착된 강력한 전자석과 코일을 통해 발생한 고주파 소리(Sound frequency)가 그 안의 물체를 뜨겁게 데우고 심지어 태우기까지 하는 힘(power)을 가진것처럼 사람의 말도 동일한 힘, 아니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힘, 진동을 가진 소리인 사람의 말은 어디서 온것인가?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Ex nihilo)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신약의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 선언하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실 때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진동 소리도 그 창조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히 4:12) 한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이런 힘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사람이 채워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쳐 그 입으로 생명의 말, 살리는 말, 축복의 말, 격려의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 속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대신 미움, 시기, 질투, 분노, 상처, 독함, 열등감, 용서하지 못함, 외로움 등이 가득차 있는 사람은 그 입에서 죽이는 말, 거꾸러 뜨리고 분열 시키며, 낙담케하는 말이 나오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약 3:10-14)”고 하듯, 이 세상 모든 피조물중 인간을 제외하곤 한 구멍에서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이 동시에 나오게 하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어떤 것들인지 가만히 귀 기울여 보라. 내 속에 무엇이 채워져 있는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탐색해 보라. 그리고 내 입에서 단물만 나오길, 살리는 말, 생명의 말, 격려의 말만 나오길 진심으로 원한다면 지금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보라.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될것이다.

by 김영기 목사




Tuesday, July 26, 2016

다림줄(Plumb Line) (7월 27일 한국일보 칼럼)

시카고는 독특한 건축 디자인과 기술로 지어진 빌딩들로 유명하다. 시카고 마천루를 이루는 건물들중1969년에 지어진442미터 높이에 108층인 윌리스 타워(Willis Tower)가 있다. 47년 동안 시카고의 세찬 바람과 추위에도 끄덕없이 하늘을 찌를듯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이 빌딩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높은 빌딩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게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 건축물은 그것이 1층 건물이든 100층 이상의 빌딩이든지 반드시 다림줄(Plumb Line)을 사용해 기준을 만들고 그것에 맞추어 뼈대를 세우고 벽돌을 쌓게 된다.

다림줄(Plumb Line)은 가늘고 긴 줄 끝에 작고 무거운 쇠덩이를 묶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풀어놓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 지구 중력에의해 반드시 지표면과 수직을 이루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축물은 모두 이 다림줄이 보여주는 수직을 기준으로 삼아 세워져야 한다. 이 다림줄을 기준으로 세워지지 않은 건축물은 한쪽으로 치우쳐 반드시 무너질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도 인생(人生) 이라는 이름의 건축물을 세워간다. 사람마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삶이라는 빌딩을 만들어 간다. 이 삶(人生)이라는 건축물을 세워갈 때도 다림줄(Plumb Line)을 기준 삼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천지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인간이 불순종함으로 죄가 들어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人生)의 다림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다림줄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살지 않으면 우리 인간의 삶은 언제든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추풍낙옆과 같은 신세가 된다.

죄(Sin)가 인간에게 들어온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두려움, 분노, 외로움, 약함, 좌절, 원망, 예민함, 복수심, 강함, 무관심, 사랑 결핍, 무기력함, 열등감, 낮은 자존감, 시기, 질투, 비교, 교만, 복수심, 반항, 가치관의 혼동, 우울증 등으로 가득차 온전한 인생이라는 건축물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삐쭉빼쭉 울퉁불퉁 튀어나온 적개심, 자만심, 의기양양, 우월의식,열등의식, 경쟁의식, 군림함, 완고함, 조작함(Manipulation), 고집불통(Stubborn), 교육불능(Unteachable), 망상, 비통함, 억울함, 비판, 지배욕, 소유욕 이라는 이름의 벽돌로 세워진 인생(人生) 빌딩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않고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건물이 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언제든 곧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 비참한것은 위에 언급한 벽돌들로 덕지덕지 쌓아올린 보기 흉물스러운 삶(人生)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을 향해 성경의 아모스 7장 7절에서 8절은“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띠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하며 심판의 잣대, 하나님의 기준으로서의 다림줄을 통해 우리 인간의 내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조명해주고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다림줄은 삐쭉빼쭉 튀어나온 인간 죄의 벽돌들을 말씀의 다림줄을 기준삼아 제자리로 위치시키고 빼내 올곧게 되도록 도와준다. 그 결과, 그 다림줄을 붙잡고 계시는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잠잠히 눈을 감고 하나님의 다림줄을 도움삼아, 내 인생(人生)의 건축물은 삐뚤 빼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벽돌로 잘 세워져 있는지 돌아보라. 언제든 무너져 내릴것같은 위태로운 상태라면 즉시 예수님께 달려가라.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것이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 링크:
http://chicagokoreatimes.com/%EB%AA%A9%ED%9A%8C-%EB%8B%A8%EC%83%81-%EB%8B%A4%EB%A6%BC%EC%A4%84plumb-line/

Thursday, July 21, 2016

개똥이 엄마 (7월 20일 한국일보 칼럼)

“개똥이 엄마”, “남산 댁” “아무개 동생” 등의 표현을 텔레비젼 드라마 속에서 뿐만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사람을 부르거나 호칭할 때 사람들이 종종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한 개인이 다수보다 두드러지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공동체적(Collectivistic) 사회 분위기가 사람을 부를 때 각 개인의 고유한 이름을 호칭하지 않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또한  남성 우위 유교 문화 속에서 여성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방편으로 직접적인 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대리적 호칭이 선호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미국 사회처럼 개인주의적 (Individualistic) 문화 환경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각 사람의 이름을 놔두고 아이의 이름을 붙여 “아무개 엄마”라 부르고, 살고 있는 동네의 이름을 붙여 “무슨 동네 댁” 또는 “누구 동생” 이라고 부르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인간이 인식하고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계는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다. 심지어 하늘에 떠 있는 별들도 그것을 명시하는 고유숫자 또는 고유의 별자리 이름을 부여받아 그대로 사용된다. 심지어 땅에 피어 있는 초목들도 자기의 이름(학명)으로 불리운다. “소나무” 보고 “은행나무 옆 나무” 라고 부르지 않고, “장미꽃” 보고 “개나리꽃 옆집 댁”, 또는 “아무개 엄마 꽃” 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창조될 때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창 2: 19) 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에서는 종종 그 이름을 바꿔 부르며 그 새로운 의미를 따라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아브람이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가 민족의 어미라는 뜻의 “사라” 로 이름이 바뀌어 불렸다. 또 야곱이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의미의 “이스라엘” 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의 후손들은 좌충우돌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살게 되는 것을 역사를 통해 보게 된다.

그만큼 불려지는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개 엄마”, “누구의 동생” 이렇게 불렸던 사람중에는 자기 자신은 없어지고 다른 존재의 장식품처럼 느끼며 슬픈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컨데, 공부 잘하는 형이나 누나와 함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동생 중에는 선생님들이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아, 너 아무개의 동생” 하며 늘 “누군가의 동생”으로 불리다 보니, 성인이 되서도, 결혼한 후에도 늘 열등감과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단 한번도 자기 이름으로 불린적이 없었다는 사람도 있다.
또 결혼후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늘 “아무개 엄마” “무슨 댁”으로 불리며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 하느라 눈코뜰새없는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성도 있다는 보고다.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과 상대방의 이름을 정중하게 불러주기를 즐겨한다. 결혼한 상대방에게 누구 누구 엄마가 아닌, 여보, 당신, 허니 또는 이름을 정겹게 불러 주는 것을 통해 더욱더 상대방이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이름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라. 그리고 그 이름 뜻에 걸맞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고 고백한 김춘수의 시처럼 이름을 불러주라. 꽃이 되고 의미가 되는 아름다운 사람을 보게 될것이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링크: 
http://chicagokoreatimes.com/%EB%AA%A9%ED%9A%8C-%EB%8B%A8%EC%83%81-%EA%B0%9C%EB%98%A5%EC%9D%B4-%EC%97%84%EB%A7%88/

Wednesday, July 13, 2016

변태 (變態) (7월 12일 한국일보 칼럼)

갑각류 절지 동물이나 딱딱한 겉껍질(외피)을 가진 곤충들은 속살이 어느정도 자라면 외피를 벗는 탈피의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 이 과정을 통해 완전히 다른 형태의 성장으로 가는 것을 한자어로 변태(變態), 영어로는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이라 표현한다.

변태 과정을 거치는 가장 흔하고 가까운 예는 잠자리 애벌레인 학배기 그리고 호랑나비 애벌레를 들 수 있다. 학배기는 아가미를 갖고 물 속에서 살다 뭍에 올라와 변태(變態) 과정을 거쳐 아름답고 투명한 날개로 하늘을 날아 다니는 모양으로 환골탈태 한다. 호랑나비 애벌레도 많은 다리로 기어 다니다 나뭇가지에 고치 형태로 매달린체 변태(Transformation)를 하게 된다. 

보기에 매우 흉칙해 보이는 애벌레들이 트랜스포메이션(變態) 과정을 통해 선녀 옷 같이 얇고 투명하며 가볍디 가벼운 날개로 산들 산들 바람을 타고 날아 다니는 잠자리와,  오색 찬란하고 화려하기 그지 없는 큰 날개를 가진 호랑나비가 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자연 법칙이다.

이와 비슷하게 만물의 영장인 사람(人間)도 변태(變態)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트랜스포메이션(變態)을 경험하고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다르다. 더군다나 인간에게 일어나는 변태(變態, Transformation)는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닌 인간 내면, 다시말해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 점이다.

변태(變態)라는 한자는 말씀 언(言)을 중심에 품은 변할 변(變) 과  가능하게 하다는 뜻의 능할 능(能)을 마음심 (心) 이 떠받치고 있는 모습태(態) 의 조합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言)을 통해서만 진정한 트렌스포메이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 학문과 철학 그리고 지혜는 마치 옷을 입듯 각 사람의 세계관에 걸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정한 내적 변화가 아닌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할 변(變)자를 따르는 모습태(態)는 반드시 마음(心)이 기반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心)이 완전히 새롭게 되어 움직이지 않으면 내적, 영적 모습이 바뀌는 것을 가능하게(能)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12장 2절은 마치 변태(變態, Transformation)라는 한자어를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 놓은듯한 놀라운 성경 말씀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al of your mind, that by testing you may discern what is the will of God, what is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로마서 12:2).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죄(Sin)로 인해 어그러지고 찌그러진 세상에서 찌그러지고 상한 영적 상태로 살아가며 문화와 기술 그리고 철학과 지식의 옷을 걸치며 단순히 세상을 본받았을 때(being conformed) 마치 최첨단의 신식, 완벽한 사람이 된듯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言)으로 마음(心)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Being Transformed, 變態)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能)되지 않는다면, 겉 모양이 아무리 화려하고 보기 좋아도 그 사람의 속 사람은 여전히 보기 흉한 애벌레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시카고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로 변태(變態, Transformation)를 경험하고 그 열매를 두 눈으로 보고 맛보는 일이 사방에서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by 김영기 목사

안정 담요 (Comfort Blanket) (7월 5일 한국일보 칼럼)

모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품에서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한살이 되면 보통은 젖을 떼고 걸음마를 시작한다. 말을 하기 시작하고 세살이 될 때까지 부모의 전적인 보호아래 자라는 것이 일반적인 아이들의 삶이다.

이 때 엄마의 젖을 떼고 자라는 과정에서 아이들 안에 안정감을 주던 엄마의 품을 대신해 줄만한 무엇인가를 찾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 때 아이들이 선택한 그 어떤 것(Object)이 있는데 보통은 아기 때 덮어주는 작은 담요일 때가 많다. 이것을 우리는 안정 담요(Comfort Blanket) 또는 안전 담요(Security Blanket) 라고 한다. 때로는 아기(Baby)가 유아(Infant)로 전환하는 과정에 일시적으로 나타나기에 전환 담요(Transitional blanket)라고도 한다.

아이들마다 천차만별이어서 어떤 아이는 냄새 나고 너덜너덜해진 곰 인형을, 또 어떤 아이는 작은 플라스틱 장난감을 안정 물체(Comfort Object)로 삼는다. 그래서 그런 물건을 일반적으로 안정담요(Comfort Blanket)라고 통칭한다.

안정담요와 더불어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빠는 모습은 매우 일상적인 모습이 틀림이 없다. 그런데 어린 아이 시기에 엄마의 품으로부터 떨어지는 불안정한 이 시기를 통과후 반드시 다음 단계의 성숙으로 자라야만 하는 속사람이 자라지 않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사춘기를 지나 청년의 시기 그리고 결혼 후 성인의 시기를 거쳐 오십대 육십대의 노년의 시기에 이르러서도 형태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아기처럼 안정 담요(Comfort Blanket)를 찾아 다니고 그것을 취하지 못하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을 보통 성인아이(Adult Child)라고 한다. 성인의 성숙함을 이루어야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성향과 행동을 벗어버리지 못한 ‘성인아이’들은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다양한 형태의 안정 담요를 가지고 있다.

예컨데, 자신의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늘 자신의 주변에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늘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한다. 단순히 몇 사람으로 구성된 모임 안에 언제나 자신이 속해 있어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친밀하고 깊은 교제 관계가 아니더라도 얕지만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관계 전선에 아무 이상이 없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 만약 관계의 깊이와 상관없이 어느 관계든지 이상이 있는듯하면 불안해 한다. 이런 사람에겐 주변 인간 관계가 안정담요(Comfort Blanket)인 샘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모임을 만든다. 어디를 가든지 주도적으로  다양한 모양의 모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취득하는 것이다.

이민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안정담요의 형태는 바로 자리(Position)이다. 언어와 문화, 피부색, 그리고 사회 구조가 다른 이민 사회에서 내적 안정감과 성취감을 취득할 수 있는 제한된 통로가 바로, 같은 인종(Ethnic Group)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Group, Community)안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것이다. 예컨데, 이민 교회와 같은 믿음 공동체에서는 자신의 내적 신앙의 성숙함과 상관없이 장로, 권사, 집사등의 직분을 추구해 얻는 것이 모양만 다른 안정 담요 (Comfort Blanket)의 역할을 한다. 모두가 그런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는 군소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이름도 알 수 없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갑자기 나타남을 통해 안정 담요를 취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모임들을 만들어서 회장, 부장, 대표, 고문, 이사 등의 자리(Position) 를 만들어 내 그것을 취한 성인아이(Adult Child)들이 존재한다.

상상해보라, 멋진 옷을 입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성숙한 얼굴을 한 성인이 담요 한장을 손에 꼬옥 쥐고 엄지 손가락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을. 내 안에 안정 담요(Comfort Blanket)를 추구하는 어린 아이가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 볼일이다.

by 김영기 목사


Tuesday, June 28, 2016

관계 (Relationship) III (6월 28일 한국일보 칼럼)

세상 모든 사람 사이에는 관계의 네가지 국면(Four phases)이 존재한다. 허니문 국면(Honeymoon Phase), 폭풍 국면(Storming Phase), 표준 국면(Norming Phase), 그리고 형성 또는 성취 국면(Forming or Performing Phase) 이다.  이 네가지 국면을 통과하며 건강하고 성숙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가로막고 깨는 요소로 인간의 본질적인 죄(Sin), 교만하고 이기적인 마음, 동감(Empathy)능력 결여로 인한 미성숙, 잘못된 주변의 의견, 삶의 나눔 결여,  그리고 소통의 문제등 여섯가지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요소들로 인해 상처받고 깨진 인간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첫째, 깨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댓가 지불이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해야만 한다.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서 2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먼저 움직이기 시작 하셨으며, 관계 회복의 책임을 하나님이 지려 하심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우리는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깨진 관계 회복을 위해 기꺼이 댓가 지불하고 책임지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해결되지 않은 관계를 그냥 방치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어렵고 힘들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관계가 깨진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 하시도록 인내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구해야만 한다. 시기 적절한 때에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성령이 도우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셋째,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려야 한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한 것처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 관계 회복은 그의 나라와 의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만을 위해 그것을 붙잡고 집착하면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 내가 먼저 풀어 놓을 때 하나님이 역사 하신다.

 넷째, 용서해야 한다. 관계가 깨짐으로 인해 마음 안에 뿌리 내린 원망함을 포기해야 한다.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의 행동을 탕감해야만 한다. 복수하고 싶은 감정을 내려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하시기 때문이다. 용서를 즐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3장 13절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명령한다. 또한 이사야서 43장 25절에서 “나 곧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심, 더이상 기억하지 않으심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에서 더이상 인간의 죄가 개입되지 않는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다. 진정한 용서는 자유함을 준다. 용서를 통해 우리 마음을 풀어내지 않으면 관계 안에서 자유함이 없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용서하면 개인적인 자유함을 갖게 된다. 더이상 관계가 깨진 사람을 만나는 것에 두려움이 없게 된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을 경우 관계 자체가 죽게 되어 계속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생각하며 속박을 경험하게 된다.

 다섯째, 겸손해야 한다. 내 자신의 고집스러운 마음, 교만, 방어적인 마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겸손하게 나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만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섯째, 기도하며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을 섬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사람이 성공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선을 행함으로 악을 이기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관계가 깨지고 나를 상처 입힌 사람을 축복하고 기도해야 한다.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이 성경적인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38절에서 45절에서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내놓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내주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경적 원리대로 선택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모든 인생 안에 존재하는 관계의 네가지 국면을 통과하며 관계가 깨졌을 때, 이상의 여섯가지 원리를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관계의 성취 국면(Forming or Performing Phase)을 취득해 묶인것이 풀리고 자유케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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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Relationship) II (6월 21일 한국일보 칼럼)

지난주 관계I 에서 모든 사람 사이에는 관계의 네가지 국면 (Four Phases)이 존재한다고 나누었다. 그것은 허니문 국면(Honeymoon Phase), 폭풍 국면(Storming Phase), 표준 국면(Norming Phase), 그리고 형성 또는 성취 국면(Forming or Performing Phase) 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 관계의 자연스러운 네가지 국면을 통과해 건강하고 성숙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가로막고 깨는 요소는 무엇일까?

첫번째 요소는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죄(Sin) 때문이다. 죄는 우리가 갖는 관계에 벽(Wall)을 세우게 한다. 죄의 두드러진 특징인 어두움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숨는 관계, 속이고 감추게 만든다. 또 다른 사람과 나의 삶을 자유롭게 나누며 빛가운데 서지 못하게 만든다. 

두번째 요소는 죄와 더불어 함께 들어온 교만하고 이기적인 마음이다.  잠언 18장 2절에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말하고 있다. 또 잠언 21장 4절은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고 선언하고 있다. 다시말해, 열등감의 동전의 양면인 교만과 이기적인 마음은 자기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되기에 관계를 깨뜨리게 된다.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며 상대방을 이기고자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게 된다.

세번째 요소는 다른 사람에 대한 동감(Empathy) 능력이 없는 미성숙함이다. 미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르고 당황하게 하거나 아프게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컨데, 어린 아이 여럿을 키우는 엄마가 너무 힘들다고 푸념할 때, “아이고 정말 힘들겠네” 동감 하기 보다는, “아이 넷 키우는거 해볼만 하다던데?” “나도 하나 낳아볼까?”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또 유산을 경험한 사람에게 “참 마음이 아프겠어요” 하기보다 “아니, 아이 가졌다고 하더니 배가 안불렀네? 왜 거짓말을 했어?” 농담처럼 함부로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이렇게 동감 능력이 떨어지는 미성숙한 사람들은 관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초현실적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것을 기대한다. 다른 사람이 완전한 것을 기대한다. 그래서 완전하지 못한 타인을 발견했을 때, 상처받고 관계의 네 국면을 계속 통과하지 못하고 떠나거나 거리를 두게 된다. 왜냐하면 현실적이지 못한 기대로인해, 폭풍 국면(Storming Phase)에서 맞닥뜨리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고통을 느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사람들은 상처가 존재하지 않는 관계를 원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 관계에서 갈등과 어려움은 직면해 통과 해야만 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과 13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 고 선언한다.

건강한 인간 관계를 방해하고 깨는 네번째 요소는 우리 주위의 잘못된 상황이다. 잘못된 철학, 책임감 없는 행동, 타인을 비난하는 사상, 세상이 이야기하는 쉬운 길, 나의 권리와 이익을 취하라는 주변의 소리 등이다.

다섯번째 요소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삶을 나누는 충분한 시간을 갖기 보다는 표피적인 만남만을 갖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아무리 자주 만나고 시간을 함께 보내더라도 사랑받지 못한 느낌, 관심밖으로 제외된 느낌, 방치당하는 느낌, 무시 당하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여섯번째 요소는 소통(Communication)의 문제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과 상대방의 이해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려는 의미를 듣는 이가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남편보다 키가 더 큰 한 여성의 아이에게 칭찬의 의도로 “아이고 어쩜 엄마 닮아서 아이가 정말 키가 크고 이쁘네” 했다가 평상시 남편보다 키가 큰 것을 힘들어하던 여성이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와 같다.

건강한 인간 관계, 부부 관계, 교회 공동체 관계, 자녀와 부모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위에 언급한 관계의 네가지 국면을 통과 하는것을 방해하고 깨는 이런한 요소들을 충분히 숙지 해야만 한다. 또한 인간 관계의 네가지 국면인 허니문 국면(Honeymoon Phase), 폭풍 국면(Storming Phase), 표준 국면(Norming Phase), 그리고 형성 또는 성취 국면(Forming or Performing Phase) 이 우리가 숨쉬고 사는 평생동안 지속되고 반복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과정을 반드시 직면하고 통과해내 열매맺는 삶, 성숙한 삶을 살기로 작정해야만 한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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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16, 2016

관계(Relationship) I (6월 14일 한국일보 칼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순간 관계(Relationship)가 형성된다. 어떤 이는 단 한번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도 있고 또 언젠가 반드시 꼭 다시 만나게 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짧은 기간 만남의 관계를 갖기도 하고 오랜동안 인연을 이어가기도 한다.

이런 여러가지 형태의 관계에는 네가지 국면 (Four Phases)이 존재하게 된다. 바로 허니문 국면(Honeymoon Phase), 폭풍 국면(Storming Phase), 표준 국면(Norming Phase), 그리고 형성 또는 성취 국면(Forming or Performing Phase) 이다.

일반적으로 허니문 국면(Honeymoon Phase)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친절과 사랑을 보여줄 때,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나와 다른 사람일 때 생기는 호기심으로 인해, 처음 만났지만 아름다운 성품으로 인해, 그리고 외적으로 관심이 가는 모습으로 인해 시작되고 형성된다. 이 국면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좋은 모습과 상대방의 좋은 모습만을 보게 된다.

허니문 국면을 지나는 동안 전에는 보이지 않고 몰랐던 것들이 상대방에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된다. 이 때부터 관계의 폭풍 국면(Storming Phase)이 시작된다. 서로의 사소한 다름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내가 이정도 밖에 안되는가?” 의심하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동시에 “정말 이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이 사람은 왜 이럴까?”, “굳이 이런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을까?” 하는 내적 질문과 갈등을 하게 된다. 이 폭풍 국면은 관계의 다음 단계로 진행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왜냐하면 이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이 있는 인간 관계안에 갈등이 없다면 현실적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그것은 생명이 없는 존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폭풍 단계에서 충분히 시간을 가지며 그 관계를 현실적으로 바라봐야만 한다.

그런데 이 관계의 폭풍 국면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를 있는 그대로 용납할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이 때 그러한 거절감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묵묵히 지나가는 이가 있고,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관계 자체를 거부하고 거절해 버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또는 관계의 한계를 미리 정해놓고 어느 선 이상 관계의 진전을 막아 버리는 사람도 나오게 된다.

이 폭풍 국면은 종종 관계가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한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 잠재 되어있던 문제들이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지니고 있던 문제들이 관계 안에 들어온 상대방이라는 거울에 비춰져 내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기간을 견디지 못해 도망(포기)가거나 폭풍 국면을 피해 다른 관계의 지름길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는 “관계(Relationship)는 배워가는 것, 훈련하는 것” 임을 간과한 것이다.  도망가거나 지름길을 찾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결코 배울 수 없을뿐만 아니라 건강한 관계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마치 사과 나무가 6년만에 열매를 맺고 포도 나무가 3년만에 열매를 맺는데 중간에 더 빠르게 열매를 맺으려고 시도하는것과 같은 것이다.

인간 관계의 폭풍 국면을 포기하지 않고 통과하고 나면 표준 국면 (Norming Phase) 안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 때는 내 자신을 관계안에 있는 상대방에게 헌신하는 단계이다. 이 사람과의 관계(Relationship)를 위해 기꺼이 댓가 지불을 하기로 생각하는 때이다. 헌신과 위탁의 관계가 생기게 된다.

이 관계를 지나며,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실수에 대한 용납과 사랑으로 덮음이 일상이 되며 서로를 성장하도록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형성 또는 성취 국면(Forming or Performing Phase)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네 국면을 묵묵히 통과함을 통해 진정한 관계란 나 자신의 내적 성숙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관계의 네 국면을 가로막는 장애요소는 무엇이 있을까? 다음주 관계(Relationship) II 에서 나누겠습니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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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une 6, 2016

경계(Boundary) (6월 7일 한국일보 칼럼)

거대한 우주 공간부터 작은 원자와 전자의 세계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들은 고유의 경계(Boundary)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모든 창조물들은 불안정 상태에서 안정 상태로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예컨데 불안정한 원자 구조는 안정 상태가 되기위해 대체 가능한 다른 원소나 전자와 강하게 합성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물들이 안정 상태 고유의 경계(Boundary)를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Human being) 뿐만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모든 동물들도 예외는 아니다.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자기만의 고유 영역(Boundary)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시하고 그 경계를 침범하는 일이 발생하면 즉시 공격적이 되듯, 만물의 영장인 사람도 경계(Boundary)를 가지고 있다.

이런 경계에 대한 인식이 개인주의(Individualistic) 사회에서는 더 명확하게 전제되고 배려되지만 공동체적(Collectivistic)  사회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강도가 약한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공동체주의 사회든 개인주의 사회든 공통적으로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인 가족(Family)에 각 개인이 속해 있기에 가족 안에서의 경계(Boundary)에 대한 인식과 배려는 필수 불가결한 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가족 안에서의 경계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고 그것은 세대를 통해 답습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가족 안에서의 경계는 크게 부모와 자녀라는 두개의 경계가 형성되고 더 나아가 아내와 남편,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각각 고유의 경계를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와 아버지 두 사람의 부부로서 형성한 경계를 인정하고 보호, 배려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아내와 남편은 아내 개인의 경계와 남편 개인의 경계를 존중하고 배려해야만 한다. 예컨데, 아내가 매일 비망록(일기장)을 작성하는 사람이라면 아내의 일기장을 함부로 열어 봐서는 안된다. 또 아내의 개인 물건을 넣어두는 곳은 비상 상황을 제외하곤 허락없이 손을 대서는 안된다. 또 아이들이 아무리 어린 나이라 할지라도 아이의 방 안에 있는 아이의 물건은 아이의 허락을 득하지 않고 함부로 만지거나 버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아내와 아이들의 경계안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만지는 순간 경계를 침해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작은 물건 하나 만지는 것이 어떻게 큰 문제가 되느랴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은 행위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실감하게 될것이다. 예컨데,  여섯살된 딸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 선물로 주었던 곰인형이 이제는 너덜너덜 해지고 때가 묻어있는 것을 본 부모가 딸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아이가 잠자고 있는사이 살며시 꺼내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 곰인형을 아이에게 안겨주었다. 아이가 새 곰인형을 반기고 좋아하며 기뻐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정작 아이는 아침에 깨어나 냄새나고 때묻은 곰인형이 사라졌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버린 곰인형은 찾지 못하고, 아이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 새 인형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여섯살이었던 어린 딸은 사십대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가 자신에게 가장 안정감을 주던 자신만의 소중한 곰 인형을 함부로 빼앗아 버렸다는 상실감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고 그것은 다양한 관계의 영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고백을 했다.

요컨데,  아무리 때묻고 냄새나며 너덜너덜한 곰 인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딸 아이의 경계(Boundary)안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딸 아이에게 물어보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고 깨는 행위가 정서적, 영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야기한 것이다.

이런일은 비단 어린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세계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상대방의 경계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조심스럽게 탐색하거나 예의있게 물어보는 과정을 통해 경계를 인정하고 배려할 수 있지만 의외로 공동체주의(Collectivistic) 또는 가족(Family) 공동체에서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거나 깨버리는 일이 쉽게 발생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것 또는 일이라 할지라도 아내의 경계, 남편의 경계, 아이들의 경계, 가정 단위의 경계, 이웃의 경계(Boundary)를 민감하게 인식해 인정하고 배려하는 일이 필수불가결하다. 당장,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나 자신과 아내, 자녀들 그리고 이웃과 세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무엇인가 생각해보고 그것을 민감하게 인정하고 지켜주며 배려해보라.  놀라운 열매를 보게 될것이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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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2, 2016

싸움의 기술 (5월 31일 한국일보 칼럼)

사십대인 지금도, 나는 배가 고프면 신경질적(Cranky)이 되곤한다. 손 닿는 곳에 먹을것이 있으면 그것을 입에 털어넣고 아무일 없는듯 우아한 성품의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 있지만 아내와 단둘이 있을때는 거의 어린 아이 수준으로 까칠해진다.

오늘, 아이들과 성경읽기를 멋지게 하고 다함께 식료품점에 시장을 보러갔다가 배가 고파 오기 시작하니 아내에게 짜증아닌 짜증을 부렸다. 아빠가 엄마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재잘 거리던 아이들은 조용해 진다. 쇼핑한 것들을 차에 싣는 동안에는 분기섞인 짜증의 수준으로 올라갔다. 예수 믿으라고 은혜를 말하는 입에서 욕만 하지 않았지, 온몸의 세포를 죽이기에 충분한 순도높은 분기가 불처럼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사실 결혼하면서 아내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싸움의 원칙"을 세워둔 것이 있는데 그 첫번째는 우리는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평생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움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결혼 기념일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더욱더 싸움의 고수가 되어 서로를 더욱더 성숙케 하는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싸움의 표본이 된다 였다.

이러한 원칙은 모든 갈등의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즉시 마음으로부터 떠 오르기에 자동차 기름을 넣는 동안 내가 왜 신경질적이 되었는지, 그 원천(Root)이 무엇인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아내가 몇가지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하긴 했지만 그것이 전혀 짜증과 분기의 불을 뿜어내도록 만든 요소가 아니라, 내 몸이 배가 고파서 밥을 원하고 있다며 아우성을 피우는 것이 원인(Root)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 안에서 일어난 원인을 놔두고 아내를 가장 만만한 희생양으로 삼는 버릇이 또 등장한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 양 미간을 긴장시켰던 긴장이 풀리며 아내에게 "여보 잘못했어, 내가 배가 고픈가봐, 정말 잘못했네, 내가 이렇지..뭐...참아줘서 고마워..." 하며 용서를 구했다. 숨죽이고 있던 아이들이 다시 깔깔거리며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싸움의 원칙중 하나인 우리는 언제든지 실수 할 수 있고 연약하지만, 반드시 자정을 넘기기 전에 용서를 구하는 것을 실행 한것이다. 

아내는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그 정도가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호전 되지만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어린 아이같이 신경질적(Cranky)인 남편의 싸움걸기에 거의 고수의 경지에 이른 싸움의 기술을 발휘한다.  인내하고 기다려주며 스스로 깨닫는 순간까지 듣기를 계속한다. 그 순간만큼은 뒤에 앉아있는 여섯살 된 셋째딸 같이 남편을 다루는 무기로 싸움의 기술을 사용한다.

우리는 밤마다 원온원(One on One)을 하며 그날 일어났던 무공대결의 순간들을 복기(Debriefing)해본다. 도데체, 그런 말과 생각과, 화냄, 말이 통하지 않는 순간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서로 나누며, 상황마다 어떻게 서로에게 반응하면 좋았을지 나눈다. 이러한 나눔을 결혼한 날 저녁부터 지금까지 실행하는 동안 아내나 나나 그리스도인 부부로서 싸움의 기술이 날로날로 높아짐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싸움이 천국에 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 부부의 싸움의 기술이 예수님 수준에 이르길 소원해 본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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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y 24, 2016

원온원 (One on One) (5월 24일 한국일보 칼럼)

사방으로 걸어다니기 시작한 갓 돌지난 막내 아들과, 종잡을수 없는 사춘기에 접어든 열세살인 첫째 딸,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있는 둘째와 셋째까지 총 네 아이와 함께 사는 아내와 나는 가능 하다면 매일 밤 시간을 내서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여러 주제 중 하나는 아이들의 성장과 더불어 나타나는 변화에 관한 내용이다.

이렇게 아내와 대화를 나눈후 의사표현이 가능한 세 아이들을 위해 선택한 접근 방법은 원온원 (One on One) 이다. 보통 두 사람이 일대일로 시간을 갖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원온원이라고 칭하는데, 단순히 표피적인 대화가 아닌 높은 수준의 대화(Qualitative Conversation)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며 나타나는 육체적 정서적 변화는 성별에 따라 그리고 나이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한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아이가 전혀 다른 양상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한 부모로부터 태어났음에도 네 아이가 각각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과 정서 그리고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 아이와 어우러져 온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일대일로 따로 시간을 내 원온원을 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따로 따로 집중된 질높은 시간(Quality Time)을 통해 아이들의 지적, 육체적, 정서적, 영적 성장을 더 깊고 넓게 그리고 유연하게 도울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들은 자신이 방치되지 않고 부모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소속감과 강한 자존감을 취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단순히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함께 놀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온원(One on One)은 함께 일대일로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열린 공간을 확보하고 적극적 듣는 행위(Active Listening)와, 화자(話者)의 감정과 기억 공간속에 청자(聽者)가 함께 서 있다는 적극적 동감(Active Empathy)을 사용함으로써 깊은 차원의 내면적 이해와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사춘기 아이와 이제 여섯살인 아이에게 적용하는 원온원의 강도는 다르지만 적극적 듣기와 동감을 언어적 행위로 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아이와 아빠가 또는 아이와 엄마가 최소 30분에서 한시간 이상을 단 한명의 아이만 따로 떼어 집중해 단둘이 순도 높은 시간(Quality Time)을 보내는 것이다. 

이런 원온원(One on One)은 비단 아이들 뿐만 아니라 성인 어른들의 관계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직장 공동체 관계 속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이웃과의 관계, 교회 공동체나 직장 공동체의 관계가 동일한 방식과 다른 강도의 원온원을 통해 더욱더 깊고 넓은 차원의 상호 이해와 신뢰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마다 보는 부부들도 일부러 단둘이 앉아 적극적 듣기와 동감이 포함된 짧더라도 높은 수준의 대화 시간인 원온원을 가져야만 한다. 또 아무리 바빠도 한달에 두번은 짧은 시간이라도 아이들과, 이웃과, 그리고 교회 공동체, 직장 공동체 구성원과 일대일로 원온원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본질적으로 원온원(One on One) 관계를 추구하고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천지만물이 창조된 인류의 시작점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죄로 인해 그 관계가 깨진 후에도 원온원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 행보는 모세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과의 관계속에서 강력하게 나타났다. 또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깨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의 관계속에서 원온원을 사용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 원온원을 적용하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리더십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적극적 사랑의 표현인 원온원(One on One) 관계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지 백마디 말이 필요없다. 지금 당장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시도해 보라.


by 김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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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May 18, 2016

사랑의 힘 (The power of love) (5월 17일 한국일보 칼럼)

화창한 오월의 푸른 하늘 아래, 둘째 아이 손을 잡고 걷는 동안 아이의 작은 샌들과 내가 신은 샌들 끝으로 하얗게 드러난 발가락들이 시소를 탄다. 아이의 발끝을 장난스럽게 따라가는 시선 위로 한 단어가 떠올랐다. "삭제가 불가능한", "지워질 수 없는 (incapable of being erased)" 뜻을 지닌 “언이레이져블(Unerasable)” 이었다. 이 단어는 심각한 연탄가스 중독과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기억을 상실해버린 내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단어이다.

1980년대 겨울밤, 온가족이 한 방에서 잠을 자다 연탄가스 중독(Carbon monoxide poisoning)으로 조용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연탄 가스로인해 온 몸의 힘이 빠지고 정신이 없었던 아버지가 죽을 힘을 다해 가족들 하나 하나를 마당으로 끌어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연탄가스 중독(Carbon monoxide poisoning)으로 인해 뇌로 가야할 산소 공급이 중단돼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이전의 대부분의 기억이 사라져 버렸다. 어린시절 내 자신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기억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이 없었지만, 정작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성경공부를 하며 어린시절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것을 써보라고 할때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것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뇌세포가 손상되어 대부분의 기억이 하얗게 지워져 버렸는데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몇 개의 단편적인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몇 개의 남아있는 기억 모두가 아버지께서 나에게 사랑을 표현했던 순간들이다.

이제는 팔순을 바라보는 아버지께서 아직 삼십대 때 직접 소나무를 깎아 팽이를 만들어 어린 내 손에 쥐어주고 함께 놀아주며 웃어주시던 장면, 아버지께서 직접 만들어준 연을 날리다 줄을 놓쳐 울고 있을 때, 젊은 아버지께서 그 연을 잡으려고 해변을 뛰어가던 모습 등이 마치 고화질 흑백 영화처럼 생생한 기억의 파편으로 남아있다. 공통적인것은 모두 아버지께서 아들인 나에게 표현했던 평범한 사랑(Love)의 장면들이다.

연탄가스가  열두살 이전 기억들을 완전히 삭제(Complete Erasing)해 버렸지만 아버지께서 표현했던 사랑의 순간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40대인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사랑(Love), 특히 아버지의 사랑 (Father's love) 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최신 뇌(Brain)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사랑(Love)이라는 감정을 관장하는 곳은 인간 뇌의 가장 깊은 곳 중심에 위치한  소뇌편도(Amygdala)라고 한다. 뇌가 외부 충격이나 감염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어도 이 소뇌편도(Amygdala) 안에 담고 있는 사랑(Love)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강력하게 남는다고 한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육신의 아버지, 한 인간 존재에 의해 표현된 사랑조차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진데(Unerasable), 하물며 온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어떠할지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 38-39) 외치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그 극진하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은 평생 단 한 순간도 그것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코,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사랑을 지우는 것이 불가능한 (incapable of being erased) 것이다.

이런 사랑의 힘(The Power of Love)을 단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은 아내, 남편, 자녀들 더 나아가 이웃과 교회, 직장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언이레이져블(Unerasable) 하기 때문이다.



by 김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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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May 11, 2016

낯선 땅에서의 관계 (5월 10일 한국일보 칼럼)

"선교사로서 한국에 살면서 가장 어렵고 괴로웠던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한국 예수전도단(YWAM Korea)을 시작했던 오대원(David E. Rose) 목사에게 던진 누군가의 질문에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의 그 어떤것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간의 갈등, 시기, 질투, 비교, 반목 등이 나를 가장 어렵게 만들었었습니다."

이것은 오대원 목사만의 고백이 아니었다. 아내와 내가 인도(India)에서 선교사로 사는 동안 인도 사람, 음식, 날씨, 그외 어떤 열악함도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한국인 선교사들간의 긴장과 관계의 깨짐, 열등감을 가진 선교사들의 비교의식 등이 연출하는 살벌한 분위기가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다행히 아내와 나는 여러 나라에서 온 선교사들로 구성된 국제 예수전도단(Youth With A Mission) 베이스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사역 함으로써 조금은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었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덤벼오는 사람들에 대해선 속수무책이었다.

대부분 팀이 아닌 단독 선교사로 선교지에 와있던 사람들은그런 묘한 갈등과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동안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우울증에 걸리는 이도 있었다. 같은 교단 출신끼리 뭉쳐 다니다가 자기들끼리 또 관계가 깨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그중엔 원하지 않는 긴장과 갈등을 견디지 못해 선교지를 완전히 떠나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슬픈 일은 비단 선교지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피부 색깔이 다른 사람으로 가득한 타국에 나가 살고있는 모든 이민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선진국인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들과 유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학위를 마치고 하루속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주 목적인 유학생 가족들뿐만 아니라 정착하기로 결정했던 이민자들도 굳이 자신들이 속해있는 국가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타 인종과 관계를 만들고 확대해가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당장 먹고 살수 있고, 한국어만 사용해도 생활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주변의 몇몇 한국인들과만, 또는 같은 학교 출신, 교단 출신, 고향 출신, 그리고 같은 교회 사람들만의 좁은 교제의 관계를 갖게 된다. 극단적으로는 집, 교회,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터와, 음식점, 도서관만 오가는 이민자와 유학생도 발견하게 된다.

그 결과로 조사된 공통된 특징은 지속적인 긴장과 갈등, 재정의 어려움, 비교, 열등감, 우울증, 자기비하로 인해 이민생활과 유학을 당장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까지 겪게 된다. 그나마 집 밖으로 언제든 나갈 수 있는 남편들과 달리 배우자들은 작게는 2배에서 3배에 달하는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고 보고 되었다. 이로인해 잦은 부부싸움을 하게 되고 때로는 이혼에까지 이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가까이 있는 한국인 이민자들과 미묘한 갈등, 비교하는 마음, 열등감이 작용해 완전히 관계를 단절해버리거나, 무시해 버리기, 왕따 만들기, 가장 가까운 몇 사람 또는 가정에 집중하기 등의 악순환을 선택하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 같은 유치함을 선택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민자들은 어떻게 이것을 방지하고 개선할 수 있을까? 최우선 순위는 먼저 자신이 넘쳐 흘러야만 한다. 당장 영적, 지적, 육체적, 재정적, 관계적 자신감이 넘쳐나지 못하니 늘 주변에 그것을 요구하고 다른 무엇인가로 채우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 채워주지 못한다. 가장 가까운 아내도, 남편도 스스로 메말라 있어 서로에게 요구만 할 뿐 채워줄 수 없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당장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만 한다. 자신의 현재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깨닫도록 조명해줄 하나님이 필요하다. 때로는 정기적인 쉼과 가족만 따로 홀로있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영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 필요하다.

두번째, 스스로 내적으로 채워지기 시작할 때 가까운 이웃들과 교제의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옆집 이웃의 여러 인종과 교제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당장 말이 통하지 않아도 된다. 관계하고자 하는 의지와 태도, 마음이 다른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혀로 만들어지는 언어를 앞서는 눈빛, 마음, 태도, 음식의 언어가, 다른 인종과 문화 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유대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면 낯선 땅에서 이민자로 살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힘드니, 집착해서 내 편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 "내 편, 내 편" 함으로써 그 관계는 속박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 관계 속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된다. 그리하면 나도 모르게 왕따 놀이를 하게 된다.

세 번째, 이런 관계의 확장과 더불어 육체적 채움도 동시에 필요하다. 잘 쉬고, 자고, 먹어야 하며, 지속적인 운동도 필요하다. 이때, 좁고 독점적인 관계를 형성해 쉬고, 자고, 먹고, 운동을 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반드시 그런 경향성을 떨쳐 버리고 다양한 관계 안으로 스스로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할 때 더이상 현재 머물고 있는 다른 문화, 언어, 인종이 있는 장소가 멀고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을것이다. 더불어, 몇몇 되지 않는 한국인 이민자 이웃들과도 오히려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 서로의 경계(Boundary)를 지켜주는 유쾌한 관계를 유지하게 될것이다.

당장 시도해 보라. 열매를 맛볼것이다.


by 김영기 목사

Thursday, May 5, 2016

사랑의 언어 (Love Language) 5월 3일 한국일보 칼럼

아내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할 때였다.  삶에서 가장 춥고 힘들었던 때, 따뜻하고 기뻤던 기억, 예수님을 만났던 순간, 가정과 친구들, 그리고 남들이 잘 모르는 감추고 싶은 연약함에 대해 조심스럽고 정직하게 서로에게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에게 나눈 연약함의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 소위 "콩깍지가 낀" 상태로 곧 결혼하게 되었다.

콩깍지 껍질이 얼마 지나지 않아 벗겨진다고들 하지만, 아이 넷인 지금까지도 아내가 예뻐보이고 사랑스럽고 귀여워 보이는 것을 보면 콩깍지가 낀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의 안경이 생긴것이리라.

그렇다고 결혼 초부터 서로 짊어지고 가기로 결정한 각자의 연약함의 십자가가 사라졌다거나 가벼워 졌다는 것은 아니다. 종종 그 십자가가 가벼워지거나 혹은  사라질거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신혼 초에 속히 인정하고 포기했다.

그래서 아내와 내가 선택한 방법은 각자 사랑 받는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가 무엇인지 열린 대화를 통해 발견해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를 지속적으로 상대방에게 사용하고 표현하는 것이었다.

남편인 내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가 칭찬(Encouragement)과 음식(Food) 임을 알게된 아내는, 무엇을 부탁할 때마다 칭찬을 양념으로 버무려서 내놓았다. 예컨데,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할 때도, "어쩜 당신 어깨는 이리도 넓어요, 정말 듬직해...멋져하며 배웅을 한다. 문 밖엔 큼지막한 쓰레기 봉투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쩜 당신은 손재주가 좋아...역시 공대 출신이야.... 이것도 고쳐주고..저것도 고쳐주고..., 고마워" 하며 감사를 표현한다. 곧 집안의 소소한 것들을 고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또 무슨 문제가 있거나, 갈등이 생길 때 기꺼이 자신이 왜 속상했는지 마음을 나누고 난후 맛있고 풍성한 음식(Food)을 만들어 내 놓는다. 그리고 늘 남편의 의견을 먼저 물어봐주고 결정을 한다. 아내가 남편의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인 칭친과 격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남편의 방식으로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되돌아 보면 대부분의 결과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있는 것을 본다.

아내의 사랑의 언어는 경청과 격려 임을 알게된 후 아내가 말 할 때마다 진지하게 듣고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다, 이쁘다, 사랑스럽다, 귀엽다, 날씬하다, 똑똑하다"는 칭찬의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를 지속적으로 진심을 담아 표현 해왔다. 사실 그것은 단순한 듣기와, 칭찬이 아닌, 아내의 속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 이기 때문이다.
종종 다툼으로 인해 화가 나서, 그 반대의  못된 말을 했다가 아홉번 잘한 것을 모두 도루묵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지만, 결혼 기념일의 숫자가 늘어 갈수록 그런 실수는 줄어들었다.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를 내 방식이 아닌 상대방의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표현함으로써, 아내는 더욱더 사랑스럽고, 우아해지고 있다. 더 지혜로와지고 영적 분별력이 깊고 넓어졌다. 나이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소유해가고 있다. 유머가 넘쳐나고, 자신감이 있으며, 주변의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며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자아상이 높아지고, 영적으로, 지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모나고 문제투성이 남편인 나 자신도 변해가고 있고 그런 부모를 옆에서 보고 자라는 아이들도 선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관계라는 토양위에 사랑의 언어를 심고 성장해 가시적인 열매를 얻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잠시라도 멈추면 순식간에 오랜동안 쌓아온 것이 와르르 무너지고 도루묵이 된다. 그래서 기꺼이 사랑의 언어 표현을 생활화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를 상대방에게 표현하면 할수록 오히려 내 속사람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해가는 자기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돈도 시간도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달고 풍성한 열매를 평생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당장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사용해 보라.


by 김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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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pril 29, 2016

에스알 (SR) (4월 27일 한국일보 칼럼)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관계(Relationship)를 형성하며 살아가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모태(母胎)에 착상된 순간부터 강력한 생명의 끈으로 연결된 관계가 만들어지고 유아기 청소년기를 지나며 점차 사회적 관계로 그 영역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된다. 

유아기때 부모와의 건강한 관계를 형성한 사람들은 청소년기에는 친구들과 친밀하고 깊은 배타적(Exclusive) 관계를 만들지만 성인이 되가며 점차 다양하고 열린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성숙한 성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이 쉽게 관계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보이지 않는 경계를 세워 교제권을 형성하는 것을 에스알 (SR: Special Relationship) 이라고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친밀하고 독점적 관계 형성을 선호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특별히 신앙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친밀함과 더불어 열린관계를 형성 하는데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친밀함을 목적으로 친한 사람, 자주 만나는 사람, 대화를 자주 나눈 사람, 함께 자주 식사를 하며 교제하는 사람들 사이에 부지불식간에 에스알(SR: Special Relationship)이라는 배타적 경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미 형성된 두 사람의 관계 안으로 제 삼의 사람이 들어가고 싶어도 보이지 않는 에스알(SR)이 강력하게 형성되어 있는 경우, 관계를 만드는데 주저하거나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는 의미이다.

특히, 관계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없는 이민 사회에서는 이러한 에스알(SR)이 매우 부정적이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언어적, 문화적 그리고 주류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장벽(Glass Ceiling)으로 인한 자기 정체성(Self Identity)의 안정감을 둘 곳이 같은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과의 좁은 관계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민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 정체성이 불안정(Insecure) 해지고 그것을 보완해줄 관계를 찾고 있거나 이미 찾은 사람들이 안정상태(Secure)에 이르면 기꺼이 열린 관계를 형성해 누구든지 그 관계 안으로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민자들이 짧은 시간안에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자기화(Assimilation and acculturation) 하면 금상첨화 겠지만 당장 목전의 삶에 전력투구 하느라 대부분이 오랜시간 이민 초기 언어와 자기문화 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래서 더욱더 동일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좁은 이민자들과의 관계에 천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동일 이민자들 관계속에서 에스알(SR: Special Relationship)을 인지하게 되면 심각한 거절감(Feeling of Rejection)을 경험하게 되어 정체성의 혼란이 지속되게 된다. 
비단 일반 이민자들 뿐만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더욱더 자신이 형성하는 관계들이 새로운 사람들이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에스알(SR: Special Relationship)을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혹은 이미 강력하게 만들어 놓고 있지는 않은지 세심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악한 영이 점유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표현할 때 ‘견고한 진(Strong Hold)’ 이라고 말하는데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친밀하지만 배타적인 관계인 에스알(SR: Special Relationship) 도 견고한 진 중의 하나임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리는 것이 아닌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가 형성하고 있는 관계는 주변 사람을 살리는 관계인지 자세히 살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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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pril 20, 2016

말의 흔적 (4월 19일 한국일보 칼럼)

얼마의 돈을 주면 인터넷에 남겨진 자신의 기록을 지워주는 회사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 기록을 지우는 것이 현재 다시 시작하는 관계나, 새로운 직장 지원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한다. 재미난 것은 기업들 심지어 교회들까지 새로운 사람을 고용할 때 인터넷 어딘가에 존재하는 지원자의 흔적을 찾아 검증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남겨진 흔적이 자신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의 심리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예 지면(紙面)이나 인터넷상에 글을 남기지 않고 말로만 표현 한다는 사람도 있다. 말로만 하면 녹음을 하지 않는 이상 휘발돼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증거가 남지 않는다는 논리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 돼버렸다. 왜냐하면 물리학과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공간에 남겨진 아무리 오래된 소리라도 그 세미한 흔적을 검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데, 20016년 2월 미국 국립과학재단(NSF)과 유럽중력관측소(EGO) 등이 협력한 천체물리학계에서 우주가 생성될 때 만들어진 미세한 중력파의 존재를 검출하는데 성공했다고 전세계에 발표했다. 다시 말해서, 우주가 생성될 때 생겼던 소리(Wave)가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공간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발표에 앞서 영국의 한 과학자는 런던 시내에서 한달전, 일주일전, 하루전에 사람들이 한 말들이 소리 진동으로 사라지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것을 특별한 장치를 통해 검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요컨데,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온 말들이 일주일 또는 한달이 지나서도 그대로 공간속에 존재해 돌아다니고 있으며 그 흔적을 찾아 언제 무슨 말을 했는지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뱉어낸 말이 오랜동안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을 고스란이 남기고 있을뿐만 아니라 언제든 그 말을 되살릴 수 있다는 엄청난 과학적 사실에, 가십과 험담으로 뱉어낸 말들을 지워 달라고 간절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넘쳐나지 않을까 싶다.  아내와 남편,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함부로 말했던 것, 상처 주었던 말들, 화나게 만들었던 말들, 모욕하고, 저주하고, 폄하했던 말들의 흔적을 돈을 받고 지워주겠다는 회사가 나타날 수도 있을것이다.

아마 그 회사는 악한 말, 거짓말, 아첨의 말, 비방의 말, 노한 말, 남의 말, 용서의 말, 원망과 불평의 말, 위로의 말, 참소하는 말, 축복과 저주의 말, 진실한 말 하나 하나에 가격을 따로 따로 매겨 돈을 받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도 절대 망하지 않을것이다. 왜냐하면 말을 만들어내는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 (약 3:7) 이며 칼과 같이 날카로와서 (시57:4)  파괴적인 힘으로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말의 흔적을 고스란이 검출해 낼 수 있으니 늘 조심하라는 경고가 물리학과 과학기술보다 수천년 앞서, 이미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1: 15-16).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사람이 뱉어낸 말을 검출해 내는 과학기술이 나타나기 전부터 이미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 (시120:2) 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남긴 말은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한국일보 링크:
http://chicagokoreatimes.com/%EB%AA%A9%ED%9A%8C%EB%8B%A8%EC%83%81-%EB%A7%90%EC%9D%98-%ED%9D%94%EC%A0%81/

Monday, April 18, 2016

아름다운 4월

4월은 정말 아름답고 즐거운 달입니다. 왜냐하면 저희 집안 모든 여성들의 생일 잔치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진주, 지나, 그리고 여왕인 제 아내가 4월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 정말 멋진 4월입니다. (April is the most beautiful and joyful month because all of women in my family have birthday parties. Gina, Jinju, and my wife who is the queen of my family were born in April. What a wonderful April is !!!)


by YKKim

네가 나를 아느냐? (4월 12일 한국일보 칼럼)

마음까지 통할 수 있는 ‘절친한 친구’를 표현할 때 ‘지음(知音)’ 이라는 고사성어를 종종 사용한다. 이렇게 서로에 대해 잘 알고 마음까지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축복임이 틀림없다.

이 고사성어의 배경인 중국 춘추시대(春秋時期)와 비교한다면 초고속 정보통신 시대인 지금은 전세계 어디서나 핸드폰을 사용해 서로의 얼굴을 실시간으로 보며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당연히, 옛 시절보다 더 깊고 넓게 그리고 더 많은 절친한 친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그와는 반대로 외로움을 호소하는 홀로족들이 전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런 현상과 더불어 페이스북, 트위터등 인터넷 사회 관계망(Social Networking Sites)을 통해 가상공간속(Online - Cyberspace) 친구를 만들고 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런데 0 1의 비트(Bit)를 기반으로한 가상공간속의  인간관계는 얼굴을 보고 상호작용할 수 없는 단절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군가를 잘 안다고 자신있게 표현하는 것을 볼 수있다. 이 때 잘 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무개에 관해 안다 (Knowledge about someone)와 아무개를 안다 (Knowledge of someone)를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무개에 관해 안다는 것은  A 라는 사람에 대해 그의 친구나 이웃 또는 다른 정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데, 유명 연애인의 혈액형, 가족관계, 취미, 좋아하는 것등을 꿰뚫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얹은 정보로 그 사람을 아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대조적으로 아무개를 안다는 것은 B라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대화도 하고 식사도 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 대상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의 기본 구성인 아내와 남편의 관계 더 나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관계의 앎(Knowing)에 관해 혼동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어떤 앎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해 더욱더 깊은 공허와 외로움 그리고 혼란속에 머물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스스로 성경을 잘 안다는 사람을 만난적이 있었는데,  C 신약박사, D 구약박사, L 유명 설교자가 말하는 성경속 하나님에 대해 청산유수처럼 읇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논리의 바탕이 되는 앎(Knowing), 자신이 직접 읽고 묵상하며 삶속에서 경험된 하나님에 관한 앎 (Knowledge of God)이 아닌, 제 삼자를 통해 얹어진 앎(Knowledge about God)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내 아내와 자녀들에 관해 옆집 사람의 입을 통해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분주함으로 인해 가장 가까워야할 하나님은 물론이거니와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딸, 엄마와 아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직접적 앎(Knowledge of )이 아닌 관한 앎(Knowledge about)이 팽배하다는 것이다. 이런 앎은 갈등과 회복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서로를 더욱더 깊게 이해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관계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된다.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네가 나를 아느냐?” 라는 질문과 동시에 직접 상호관계속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다.  예컨데 아이들이 셋이라면 평상시 아무리 세 아이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더라도 따로 따로 한 아이씩 30분 또는 1시간씩 높은 수준의 시간(Quality time)을 가져야 한다. 많은 이웃과 함께모여 자주 교제를 할지라도 반드시 한 가족씩 따로 시간을 내서 교제하고 상호작용하는 앎(Knowing)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끝났을 때 네가 나를 아느냐?” 질문에 대답할 것을 매일 준비하는 우리가 되야겠다.


한국일보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