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20, 1999

인생은 아름다워


'깨지지 않는 영원한 세계.'


"안녕하세요 공주님, 어제 밤새도록 그대 꿈을 꾸었다오, 같이 극장엘 갔는데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옷을 입고 있었어. 난 당신 생각 뿐이야.

항상 당신만 생각해."

"엄마!... 아빠가 손수레에 태워줬는데 운전을 잘 못해. 너무 웃겨서 배가 아파.

우리가 일등이래.. 오늘은 몇 점 땃지?"

"뛰어 ,  소리치는 나쁜 사람들이 쫓아 온다."

한국에 영화가 소개되기 한달 전부터 가슴을 설레이며 기다리던 영화, 타임지에

실린 '인생은 아름다워' 라는 제목의 영화는 흑백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나를

압도하던 쉰들러 리스트를 우선 생각하게 했다. 이탈리아인의 눈으로 보여지는

세계대전을 두고 왜 인생은 아름다워 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의아해 했다.

우선 타임지에 실려 곧 한국에 상륙한다는 이야기는 좋은 영화를 기대하는 마음을

더욱 설레이게 했다.

로베르트 베니니 분의 귀도 오라피체.  그는 치열하고 무서운 전쟁을 우리 주변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기 위해 챨리 체플린 Character로 화면에 나타난다.

그는 조금은 상기되어있고 늘 호기심에 가득찬 천진한 아이와도 같다.

전쟁을 상상하기엔 너무도 먼 '인생은 아름다워' 라는 제목처럼 영화는 고장난

차를 타고 왕의 행차에 끼어 우연과 유머를 가장하며 나타난다.

시작부터 복선을 아무런 필터없이 보여주는 영화는 자못 유치한 옛 영화의 전개를

상상케 했다. 그것은 감독의 여유였을까? 아니 그것은 챨리 체플린의 독재자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페러디를 통해 전쟁의 비극과 무서움을 완충하는 기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야만인, 침묵만큼 큰 저항은 없다" 라는 화면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연결되지

않은 대사를 읊는 삼촌 엘리시오 오라피체. 로베르트 감독은 그의 입을 통해 전쟁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관객에겐 전쟁은 아직 먼 기다림이라는 화면을 선사하고

있지만 전쟁은 이미 영화의 처음부터 시작되어 있었던 것이다.

스크린 가득히 어설픈 숨은 그림처럼 숨겨진 복선은 오히려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는 양념이 되고 있었다.


침묵에 대한 구호는 수수께끼에 심취해있던 레씽 박사와의 이야기 속에서도

고개를 든다.

" 말을 하면 없어져 버리는 것,,,침묵..."

의학박사 레씽은 홀로코스트(holocaust)의 복선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교묘하게 귀도와 좋은 친구로 표현되고 있었고 수수께끼를 매개로 이미

영화 속에 전쟁을 첨가해 넣고 있었다. 후반부에 나오게 될 생체실험과 대학살의

장면을 의사 레씽을 세워 맛보게 함으로써 브레이크가 사라져 세울 수 없는

가속도와 충격을 보여주던 첫 장면의 자동차를 연상케 했다.

자동차는 완충작용, 자연스러운 전쟁으로 관객을 이끌기 위한 대 제목이었다.

로베르트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는 영화 전체를 볼 때 하나의 대칭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의 모든 장면은 이미 이중적 구조로 영화의 전반부에 모두

표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이중구조는 조수아가 생일 때 목욕을 하지 않겠다고

반항할 때도 새롭게 반복되고 있다. '목욕' 그것은 가스실의 새로운 언어였다.

아름다운 언어...

"또 갑자기 만나기를 기대해요" 라며 호기심 가득한 동그랗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니콜레타 브라치 분의 도라. 그녀는 전쟁을 일으킨 독일 나치와 그 희생이 된

유태인을 이어주는 매개로 등장한다. 그녀는 전쟁을 통과해낸 평화의 산물 아들

조수아 오라피체의 출발점이 된다.

그녀의 남자친구 로돌프는 '아돌프 히틀러'를 표상해 내고 있었고 도라는

로돌프로부터 유태인인 귀도 오라피체에게 도망가버린다. 전쟁에 대한 혐오를

도라를 통해 영화속에 삽입해낸 로베르트 감독의 아름다운 구상이 돋보인다.

초등학교에서 로마의 장학사 흉내를 내며 옷을 벗고 "우리 민족이 얼마나

우월한 민족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라며 독일 나치의 게르만족 우수성을

전쟁의 기반으로 삼은 의식화 운동을 모욕한다.

로베르트 감독은 계속해서 모든 등장 인물의 대사를 통해 독일 나치,

게르만 민족을 경멸한다. 그의 경멸의 말투는 가볍고 유머러스하며 전혀

아프지 않다. 특별히 배꼽을 드러내며 초등학생들 앞에서 장난을 치던 귀도는

전쟁 전체를 조감하는 감독의 눈과 희망의 대리인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 속에서 아버지 귀도는 전쟁에 돌입하는 순간부터

아들 조수아의 세계에 절대 파괴될 수 없는 세계를 만들어 나가도록 도와준다.

그 세계는 주변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희망과 평화의 세계는 깨뜨릴 수

없다는 메시지였다. 그것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었고 외계의 모든 것을 재미난

게임으로 보게하는 페러다임 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충격, 가스실의

무서움을 목욕으로 표현해내던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의식.

그 모든 것을 귀도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달동안 계획을 짠거야. 이건 게임이야. 우린 전부 선수야.

일등하면 탱크, 진짜 탱크를 상품으로 받아, 게임이 끝나면 1000점을 딸 수 있고

엄마에게 갈 수 있어..."

아들의 눈과 마음의 세계에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추하게 파괴될 수 없음을

가르친다. 귀도는 유태인 가스실에서 살아나온 의사 빅터 프랭클이 이야기한

우리의 육체를 공격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의식과 그 의식 속의 평화에 대한

믿음과 희망은 깨뜨릴 수 없다는 실제적인 이야기를 대변해 내고 있었다.

귀도와 조수아의 내면의 세계에 안전하고 강력한 경계를 가진 또다른 세계가

나타난 것이다. 감독은 조수아의 세계를 바라보던 페러다임을 영화 전체 속에서

반응하고 살아가던 귀도를 통해 이미 실천해 주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조수아에게

가르치게 한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연신 이탈리아인 감독이 만들었지만 미국적인 냄새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영화가 영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미국에게 어필하기 위한

감독의 약간의 타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냄새는 삼촌의 말인 '로빈 훗'에서부터 풍겨나오기 시작했다.

'로빈 훗'은 미국을 대변하는 영웅이다. 삼촌의 말 '로빈 훗'은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의 큰 별을 달고 나온 탱크로 새롭게 선보였고 그 말(탱크)을 타고 있던

영어를 쓰던 미국인 병사가 그것을 확증해 주고 있었다.

로베르트 베니니 감독의 어설픔 이라는 채플린적, 미국적 페러디의 도입과

세계평화의 메신저로 등장하며 영화를 끝맺는 미국에 대한 표현은

인생은 아름다워의 영화에 옥의 티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은 멀리 떨어져서 본다면 로베르트 감독은 이미 미국에

타협한 듯 하지만 미국까지도 경멸하고 있었다.

미국인 병사는 아름다움과 평화의 깨지지 않는 세계를 표상하는

조수아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초콜렛 먹을레?"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면서 내내 웃음과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통털어 여전히 세계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과

희망을 품어낼 수 있었다. 또한 삶을 대하게 될 나의 태도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다고 기꺼이 자신할 수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보다는 그 속에서 어떤

힘도 절대 깨뜨릴 수 없는 희망과 평화의 세계를 구축해야만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맛보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우리 세대가 만들어 가야할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준 로베르트 베니니 감독에게 감사를 표한다.






                     靑潭.  

Saturday, October 24, 1998

부천 자유시장

부천 자유시장.

떡하니 현대판 타워링처럼 버티고 서있는 이-마트의 옆자락으로 토끼집같은

자유시장의 입구가 있다.

발 디딜틈 없는 그곳을 북적거리면서 걸어들어가니 사람 사는 생기가 어깨를

절로 신이나게 한다.

김이 모락 모락 나는 솔잎과 어우러진 송편가게. 아주머니들이 뜨거운듯 입을

훅훅 거리며 씹는 그것을 나도 한 개 집어 먹어본다.

사람들이 사가지고 가는 송편보다 집어먹는 송편이 더 많다. 그래도 주인은

신이난듯 얼굴이 벙글 벙글한다.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 사이로 순대국밥 집이 있다. 오랜만에 시장에서 만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허허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이도 있고, 손자의

입에 뜨거운 국물을 수저로 먹여주는 할아버지도 보인다.

"떨이요!..." " 쌉니다..싸요...!"

추석 명절을 준비하기 위해 시장을 찾은 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장은 자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곳엔 훈기가 있고

사랑과 대화가 어우러지고 있었다.

수백개의 형광등의 조명을 받으며 바코드가 찍인 종이에 묶여있던 이-마트의

깔끔한 파가 생각이 났다. 그 파는 이곳 자유시장의 넉넉한 손길에 묶여 어둑한

조명 속에서도 흙 뿌리의 파릇파릇한 그것과는 무언가 달랐다.

무엇일까?

이-마트의 현대식 카트를 끌며 대형매장을 둘러다녀봐도 친한 친구와

함께, 아들과 함께, 형제들과 함께 따끈한 순대국밥을 먹으며 소담스런

삶을 이야기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서늘한 냉동 안개가 마음을 춥게 할 뿐이었다.

삶의 든든한 무엇인가를 가득히 채운 순대같이 길다란 천막속에서

숨쉬던 자유시장을 빠져나와 이-마트의 시커먼 지하주차장으로

경적을 쉴새없이 울려대는 차량의 행렬을 바라다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랑'이었다.

사람들의 옷깃에 벌써 겨울이 묻어나고 있다.

난로를 준비해야겠다.

훈훈한 마음의 벽난로를..





                       靑潭.

Thursday, September 24, 1998

The door


토요일.

교회에 가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하나님 차비 주세요. 기도한다.

몇 달 동안 한번도 빠짐없이 차비를 주셔서 교회에 넉넉하고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오늘도 느긋하게 이불 속에 누워 하나님 차비 주세요

기도했다. 마침 주머니에 5백원짜리 동전 하나가 있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와우. 교회갈 차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기도를

하자마자 바로 전화벨이 울린다.  '영기냐. 오늘 토요일 이니까

늦지 않게 동사무소 가서 등본 세 통을 떼 놓으렴' 어머님의 전화다.

등본을 떼고보니 주머니엔 동전 두개가 남았다.

아버지 어쩌죠...  주님은 토실 토실하게 살이 붙은 허벅지를 내려다 보시며

"오늘은 걸어가렴.." 하신다.

교회까지 산 하나를 넘어간다. 차분하고 평온하게 걸어가는 시간

참으로 오랜만에 산보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몇 개월간 전철이나

버스만 타고 다녔던것 같다. 간만에 맛보는 도보 묵상 시간이다.

쑥 고개마루에 문들이 많이 서 있다. 멋있는 문양이 박혀있는 문(door) 만드는

공장을 빙 둘러싸고 문들이 세워져 있다. 그 많은 문들 중 하나를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동했지만 그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냥 보기 좋게 전시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공장으로 들어가는 진짜 문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

는다. 연달아 붙어있는 수 개의 문들 중에 어느것이 입구로 들어가는 진짜

문일까?

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문(The door)을 알고 있다. 지금 걸어가며 나를

훑고 지나가는 모든 순간이 나에겐 문 인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

느니라 말씀하신 예수님이 바로 나의 문(The door) 인 것이다.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아름답게 장식한 대문 공장의 전시된 문과 같은 것

을 두드리고 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이 문들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벽

이 있을것이다. 모두가 가짜 문인 것이다. 그곳엔 오직 하나의 진짜 문만 있을

뿐이다.

난 고민하지 않는다 언제나 손을 내밀어 열 진짜 문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곳

엔 예수님과 함께 산책할 동산이 있다. 난 자주 그 동산에서 꽃을 심고

달고 맛있는 포도를 따 먹곤 한다.

쑥 고개를 넘어서서 한 숨을 돌리고 나니 배가 고파온다. 벌써 점심시간인가?

주머니 속에서 동전 두개가 잡혀온다.

따르르릉 여보세요,  ' 어? 어디냐? 밥 먹었니?'

교회 근처에서 태권도 도장을 하는 형이 내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점심이나 함께 먹자고 권한다.

오늘 주님은 넉넉히 산보할 시간도 주시고 점심도 주셨다.

난 오늘도 그 문(The door)을 기꺼이 열어주신 주님의 손을 잡아 본다.




                            靑潭.

Friday, July 24, 1998

그림 속의 치유자

 
시원한 매미 소리가 여름 날을 녹히고 있는 어느날 한 대학병원에

갔었다. 대학병원 중앙 현관을 지나자 정면으로 커다란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 속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와 그를 진찰하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그리고 간호사가 등장하고 있었다. 내 눈을

놀라게 했던 것은 그 세 사람을 따뜻한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며

함께 서 있는 예수의 모습이었다. 병원에 이런 그림이 있구나 하며 신기해

했다.

과학적 의술을 가장 신뢰하는 대학병원 중앙 홀에 환자와 의사 예수님이 함께

등장하는 그림을 본것은 난생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학병원이

기독교 대학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그림은 중요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5월, 대학입시에 여념이 없던 그 때 보충수업을 땡땡이 치고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시외로 나갔었다. 답답한 교실에 앉아 칠판과 선생님

얼굴만 바라보다 녹음이 우거져 가는 5월의 오후에 시원한 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타는 자건거는 친구와 내 마음을 더욱더 신나게 했었다.

그러던중 과천 고개를 넘어 굉장한 속도로 내달리다 좌회전 하던 차량과

정면 충돌을 하고 말았었다. 뒤 따라 오던 친구의 말에 의하면 공중으로

수 미터를 붕 떳다가 땅에 떨어졌고 곧바로 영동세브란스 병원으로 긴급히

후송되어 씨티(CT) 촬영과 엑스레이(X-RAY)을 수 십장 찍었다고 한다.


충격에 의한 뇌진탕으로 좌뇌와 우뇌 간격이 벌어진 이상부흥상태 진단을

받았었다. 대학입시를 일년 앞둔 그 때 멍한 상태로 하루 하루를 통원치료하며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찢어진 부위를 꿰맨 후 매일 독한 주사를 두번씩 맞았었다.

그 때 친구의 권유로 신앙을 갖게 되었고 사고후 3년째 될무렵

더이상의 후유증없이 완케되었다.


'병이나 상처를 다스려서 낫게한다'는 치료(治療)와 '치료로 병이 나음' 이라는

의미의 치유(治癒) 라는 말이 있다.

다시말해 우리의 몸이 찢어지고 아플 때 의사가 꿰매고 소독하고 약을 주사하

여 상처나고 아픈 곳을 봉합하는 치료과정을 큐어(Cure)라고 한다.

그 이후 의사의 치료에 대한 인체 내부의 여러가지 작용과 우리의

희망적인 의지가 함께 동원되 나아가는 과정을 치유 즉, 힐링(healing) 이라고 말한다.

치유와 치료가 함께 있지 않으면 우리는 병으로부터 나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교통사고후 병원과 의사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과정인 치료(Cure)를 충분히 받았다.

동시에 나을 수 있다는 희망적 의지와 내 몸의 치료에 대한 반응은 치유과정

(healing)을 오랜동안 견딜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의사와 병원이 최선을 다해 해낼 수 있는 치료 이후엔 우리 몸을 창조해 놓으

신 그분의 전적인 힘인 치유(healing)가 있어야만 온전히 나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대학병원의 의사들은 이런 원리를 겸손히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깊고 뜨거운 사랑과 의지 그리고 평화와 진리가 함께 버무려진 모습으로

대학병원 중앙현관 홀에 있던 그 그림속의 치유(healing)는 이미 내 마음의 현

관 안에 그분과 함께 걸려 있었다.

Sunday, May 24, 1998

I trust you

하나님 저로 하여금 쉬운 부정보다는 힘든 정의를 선택하

게 하옵시고, 절반의 진실에 만족하지 않고 전부의 진실을

찾게 하옵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사 고상하고 값진 모든 것

에 충성하게 하옵시고, 악과 불의와의 타협을 거절하며, 정

의와 진리가 위험에 빠졌을 때에 비겁하지 않게 하옵소서.


제 방 한쪽벽에 굵은 글씨로 쓰여진 자기 선언문 이랍니다.

영화 타이타닉을 보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나옵니다.

레오는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허리까지 차오른 객실에서 케이트는 사랑하는 레오를

구해내기 위해 날카롭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끼를 구해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귀족처럼 자라 망치질 한번 해보지 않았던 케이트는 자기가 실수 할까 두려워 머뭇거립니다.

이 때 레오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I trust you!"


케이트는 단번에 수갑을 끊어냅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를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고 두렵게 만들기도 하는 수많은 수갑이 있
습니다.

대부분은 마음과 환경의 수갑입니다.

또 자신의 무력함과 열등감으로 어떤 일을 결단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I trust you!"


우리 함께 자기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의 동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봐요.


      "I trust you!"


우리를 묶어두었던 수갑은 단번에 끊어질 것입니다.




               靑潭.

Friday, April 24, 1998

어머님 다라 비빔밥

김치거리가 비싸서 어머님의 눈초리는 요것 조것 만지작 거리며 들춰도 보

고 흔들어도 보시곤 그래도 자식놈처럼 묵직하고 단내가 물씬 풍긴 배추 몇

포기를 사들고 오시더니만 큰 갈색 다라(대야)에 그것을 푹 절여놓고 빨래

를 하신다. 손빨래가 모두 끝난후에 세탁기에 넣어 한번더 돌리시는 어머님

정성이 보통이 아니다. 하긴 다 큰 사내자식들 속옷은 아무리 강력한 세탁

기라도 그 빤스에 누렇게 뜬 자욱은(?) 빼기 힘들테니 말이다.

큰 다라에 수북히 쌓여서 배불뚜기가 되어있던 배추는 숨을 죽이면 푹 가라

않아서 얌전해 지고 어머님의 배추 다루는 솜씨는 본격적인 게임으로 들어

간다. 소금기를 빼기 위해 빨래하듯 물을 그득하게 붓고 씻어내기를 여러번

그것을 또 꾸욱 짜서 물기를 빼내면 김치가 될 자격이 되는 배추포기가 된다.

케로틴이 많이 많이 들어있다는 당근(32 킬로칼로리)을 채 썰어놓고 무우

(18 Kcal), 양파(35 Kcal), 파 등을 넣어서는 그 위에 고추가루를 듬뿍

넣어 버무린다. 가장 중요한것은 새우젓인데 예전엔 비싸서 멸치젓을 더 애

용하곤 했지만 그래도 만불 소득시대를 구가하고파서 새우젓을 2통 넣고는

손이 빨간 색으로 물들 때까지 잘 비비고 버무린다. 마지막으로 조미료를

넣어 맛을 내는데 가장 핵심적인 비법으로 조미료를 넣지 않으면 않을수록

먹는 사람 건강에도 좋고 어머님의 손으로 비비면 비빌수록(절대 고무장갑

을 끼고 버무려서는 안된다) 손맛이 어우러져 그 맛이 천상의 신선이 먹는

김치에 비견된다. 이렇게 버무리고 비벼서 하얀 허벅지를 드러내고 기절해

있는 섹시한 배추포기 사이 사이에 넣으면 된다.

모두 되었다 싶으면 곧바로 뜨거운 바람에 쐬이지 않고 산달에 가까워진 며

느리 대하듯 김치통에 넣어서는 하루정도 그늘진 곳에 놓아두신다.

마지막 절차로서 모든일에는 마무리가 중요하다고 했다. 용두사미는 훠이

훠이 하시면서 어머님 손맛이 잔뜩 베어있는 다라에 남은 빨간 양념 위에

김이 모락 모락 나는 하얀 쌀밥을 넣고는 그 위에 참기름을 쭈욱 떨어 뜨린

다. 그리고 아직 씻지 않은 어머님의 양념이 가득히 묻은 손으로 정말 보기

만 해도 침이 꾸울꺽 넘어가는 비빔밤을 버무려 주시는 것이다. 모두 비빈

후에 막 만들어져 김치통에 들어간 그 배추 속내를 몇개 따내어 쭈욱 쭈욱

찢어서는 비빔밥 위에 얹어 주신다. 그 커다란 다라(대야) 에 우리 삼형제

그리고 어머님 모두 둘러 앉아 먹는 점심은 가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요즘은 젊은것들이 모두 인스턴트 김치를 사다먹는다 어쩐다 하던데 여러분

도 어머님 다라에 빚어져 어우러진 그 다라 비빔밥을 좀 먹어보시구려....


배추꽃날에...



                              靑潭.

Friday, October 24, 1997

동행


청계산 산자락 끝에 매달린 가을은 벌써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오랜만에 달고 맛있는 산공기를 맛보고 싶은 마음에 친구와 함께

산보에 나섰다. 널찍한 공터에 이르러 기지개를 켜며 지난

여름동안 훌쩍 커버린 나무들을 바라다 보았다. 내 영혼의 키가

저렇게 훌쩍 커버린다면 놀랄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킨 마음에 두 눈을 꼬옥 감고 걷기 시작했다. 옆에서 아무말

없이 걷고 있는 친구의 발자국 소리가 더 크고 또렷이 들려온다.

콧등을 스치는 바람의 소리도 들리지만 내가 안전한 길로 걷고 있다는

마음의 평안은 옆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들려오는 친구의

발자국 소리 때문이었다.

친구가 문득 걸음을 멈춘다면 나는 혼자 걷다가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일 것이 틀림없을것이다. 두 눈을 꼬옥 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때 내 옆에서 들려오는 동행의 발자국 소리는

내 중심이 되고 평안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자주 그분이 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영혼의 분주함으로 그분이 동행하는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하곤 한다.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겨울낙옆 숲에서

그분의 깊고 가벼운 평안의 소리를 듣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영혼의 암흑 속에서도 성큼 성큼 걸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동행의 소리.




                            靑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