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18, 2016

커뮤니케이션 (3월 22일 한국일보 칼럼)

(Speaking) 잘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時代). 지면(紙面)이나 인터넷 온라인을 채우는 활자화된 말뿐만아니라 입 밖으로 소리를 내서 논리정연하고 유려(流麗)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수 있다. 더군다나 인터넷 범용화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정보 접근성을 갖게 되면서 말은 근거의 힘까지 갖춘 유창함이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말 잘하고 대화를 자주 나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가장 가까운 남편 또는 아내로부터 시작해 친구, 직장 동료와 상사, 더 나아가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속에서 소통(疏通)의 장벽을 경험하곤 한다. 함께하는 시간도 많고 대화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통의 충돌이 지속되면 서로 관계가 깨지고 상처를 주거나 극단적으로는 공동체가 분리되고 파괴되기까지 한다. 말 잘하는 사람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말을 잘한다’ 또는 ‘대화를 많이 한다’는 것의 실체를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면, 대부분 말을 통해 나온 정보의 양과 대화에 사용된 시간과 상관없이 그것이 ‘일방적’일 때 소통의 장벽을 경험하고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방적 이라는 것은 그 대화속에 소통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소통(疏通)이라는 말이‘서로 막힘 없이 통하는 것’ 즉, 상호성과 양방향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소통은 단순히 말을 잘하고 무의식적으로 듣는(Speaking and hearing)것이 아닌, 의식적으로 결정해 적극적으로 듣는(listening) 행위를 내포한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4세기 후반 라틴어에 뿌리를 둔, 이‘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말은 ‘나누다(To share), ‘하나되다(Unite), 그리고 ‘공통되다(Common)’ 라는 단체성의 옷을 입고있다. 그래서 언어 학자들은 ‘공동체(community)’라는 단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구성원들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무형의 끈을 사용해 공통됨을 공유하고, 나누고, 하나되어 공동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 커뮤니케이션이 없는곳엔 공동체(community)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말 잘하는 사람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작은 공동체인 부부, 부모와 자녀, 친구 관계로부터 시작해 큰 공동체인, 직장과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 이르기까지 소통(疏通)의 장벽으로인해 서로 이해할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관계가 깨지고 상처를 주거나 극단적으로는 공동체가 분리되고 파괴되기까지 하는것이다.
                         

일상에서 이렇게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은 가장 먼저 적극적 듣기(Active listening)를 통해 남편과 아내, 친구와 직장 상사, 공동체 구성원들을 친밀하고 깊게 연결(Connected) 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것을 기반으로 형성된 상호간의 깊은 신뢰가 적극적 나눔과 하나됨의 정신으로 버무려져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공동체(Community)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동체 속에서 개인은 소속감과 안전감(Security)을 갖게되며 그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외부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상호 건강한 커뮤니케이션을 공유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배워 자신이 속한 관계속에서 영적, 육적, 지적, 사회적으로 건강한 커뮤니케이션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가족 구성원들이 모인 사회 공동체와 믿음 공동체는 서로 나누고 하나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내가 속한 가장 작고 가까운 공동체인 부부관계로부터 시작해, 부모와 자녀, 친구, 직장, 교회에 이르기까지 관계가 깨지고 서로 상처를 주며 마치 거대한 장벽앞에 서있는듯 갈등과 반목의 상황에 처해 있다면, 즉시 자신이 말을 하고 있는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할 것이다.

한국일보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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