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11, 2016

사랑 한판 (8월10일 한국일보 칼럼)

아이가 넷인 아내와 나는,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더군다나 딸 아이여서 더 애지중지 했었다. 아내와 나는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넘치도록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 첫째 아이에게 특별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놀아주고 관심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막 태어난 아기를 안고 기쁨을 표현할 때마다 자신이 받을 사랑과 관심을 빼앗긴듯 상실감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첫째의 모습은 아직도 가족 사진 몇장에 남아있다.

우리는 첫째 아이에게 백퍼센트(100%) 보다 더 넘치듯 관심과 사랑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가 사랑으로 배가 부르고 만족한 상태로 둘째 동생과 지낼 것으로 생각했었다. 다시 말해서, 첫째 아이에게 반절(50%) 둘째 아이에게 반절(50%)씩 부모의 사랑을 표현하고 돌봐주면 될것이라 착각을 한 샘이다. 그 결과, 첫째 아이는 이전과 동일하게 백퍼센트 사랑과 관심 받기를 여전히 원하고 있고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다양한 반동(Reaction)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와 이 상황을 놓고 함께 기도한 후, 말 못하는 갓난 아기인 둘째에게 해야할 일을 마치면 아내와 내가 번갈아 가며 짧더라도 매우 질높은 시간(Quality Time)을 첫째 아이와 갖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첫째는 자신에게 부모가 온전한 관심과 사랑을 여전히 흘려 보내주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기 시작했다. 아이 사랑하기가 반절(50%)이 아닌 백퍼센트(100%)에 가까워진 것이다.

셋째, 넷째 아이까지 합류하면서 25%씩 쪼개어 네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짧더라도 질높은 시간(Quality Time)을 네 아이와 따로 따로 가짐으로 백퍼센트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런 시도는 아이들 하나 하나가 자신에게 네등분된 것중 한 조각의 사랑을 먹고 배고파하는 것이 아닌 온전한 사랑 한판을 먹고 만족하게 되는 열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랑 한판(100%)을 추구하고 요구하는 것은 비단 아이들 뿐만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예컨데, 결혼한지 얼마 안된 젊은 부부들이 겪는 가장 큰 갈등중 하나가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할 것인가다. 더군다나 요즘엔 결혼해서도 여전히 부모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세대가 많아서 그 갈등은 종종 이혼까지 이르곤 한다.

이런 갈등을 해결할 방편으로, 이제 막 가정을 이루어 함께 살기 시작한 배우자에게 반절(50%) 그리고 부모님께 반절(50%)씩 시간과 돈 그리고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이것은 온전한 사랑 한판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 사람에게 잘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배우자 뿐만아니라 부모님도 동시에 반절(50%)의 결핍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결혼해 함께 살고 있는 배우자가 백퍼센트 사랑과 관심을 높은 순도와 질로 (Quality Time)  서로에게 표현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짧은 시간이라도 깊은 내적 대화와 서로를 이해하고 동감하며 함께 서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질 높은 사랑 한판을 먼저 배우자에게 공급해야만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내에게 백퍼센트 그리고 남편에게 서로 공급된 백퍼센트 사랑이 합쳐지면 부부 총합 이백퍼센트가 아닌, 백퍼센트 사랑 한판이 만들어진다. 이 사랑을 부모님께 흘려 보낼 때 비로소 부모님도 백퍼센트 사랑 한판을 받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랑 산술(Math of Love) 이다. 사랑 산술(算術)에서는 사랑 한조각 더하기 다른 한조각은 한조각이 되며, 사랑 한판 (100%)더하기 다른 한판(100%)을 해야만 한판의 결과가 나온다.

이런 사랑 산술은 교회 공동체, 가족 공동체, 그리고 사람이 모여있는 모든 공동체에 동일 하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사랑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죄로인해 그 사랑의 공급처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후 다른 곳에서 그 사랑을 취하려고 했지만 결코 온전한 사랑을 취할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신것이다 (요 3:16). 환언하면, 하나님이 사랑 한판을 인간에게 온전하게 주신것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 한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퍼센트 자신을 내어주어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다시한번 인간 각 사람이 온전한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게 된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 한판을 온전히 취하고 날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와 자녀들 가족 그리고 가까운 이웃과 세상에 사랑 한판씩 온전하게 나누며 사는 삶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시도해보라, 놀라운 열매를 보게될 것이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 링크: 
http://chicagokoreatimes.com/%EB%AA%A9%ED%9A%8C%EB%8B%A8%EC%83%81-%EC%82%AC%EB%9E%91-%ED%95%9C%ED%8C%90/

Tuesday, August 2, 2016

말의 힘 (8월 3일 한국일보 칼럼)


사람의 귀가 소리로 인식할 수 있는 가청 주파수는 20 에서 2만 헤르츠(Hz) 사이다. 물질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는데 그 진동이 가청 주파수의 진동 수를 유지하며 공기를 가로질러 인간의 귀에 이르러 고막을 진동시키고 그것이 뇌에 전달되어 소리로 인식하게 된다.

가청 주파수 영역외의 것을 저주파 또는 고주파라고 한다. 고주파의 영역을 우리 일상에서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것이 바로, 전자레인지(Microwave)와 핸드폰(Cell phone)이다. 전자레인지는 약 2.45 기가 헤르츠(GHz) 진동하는 소리(주파수)를 쓰며, 핸드폰은 800 메가 헤르츠 (MHz)와 1900 메가 헤르츠(MHz) 사이의 소리(극초단파)를 사용한다.

전자레인지(Microwave)에 닭(Chicken)을 넣고 작동 시키면 강력한 극초단파(Microwave)가 닭의 물분자를 진동시키는 힘으로 열을 발생시켜 조리가 되게 만든다. 잘못 다루면 심지어 화재가 나거나 폭발할 수도 있는 힘이 전자레인지에 있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전자레인지(Microwave)와는 진동수만 차이가 날뿐 본질 자체가 똑같은 소리인 사람의 말도 힘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의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다. 예컨데, 잠언 18장 20절과 21절은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경고하며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힘(power)이 인간의 말에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잠언 13장 2절은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하며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인생의 복락을 좌지우지 함을 보여준다.

야고보서 3장은 사람 말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림처럼 보여준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거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야고보서 3:4-6).

전자레인지 안에 장착된 강력한 전자석과 코일을 통해 발생한 고주파 소리(Sound frequency)가 그 안의 물체를 뜨겁게 데우고 심지어 태우기까지 하는 힘(power)을 가진것처럼 사람의 말도 동일한 힘, 아니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힘, 진동을 가진 소리인 사람의 말은 어디서 온것인가?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Ex nihilo)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신약의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 선언하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실 때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진동 소리도 그 창조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히 4:12) 한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이런 힘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사람이 채워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쳐 그 입으로 생명의 말, 살리는 말, 축복의 말, 격려의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 속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대신 미움, 시기, 질투, 분노, 상처, 독함, 열등감, 용서하지 못함, 외로움 등이 가득차 있는 사람은 그 입에서 죽이는 말, 거꾸러 뜨리고 분열 시키며, 낙담케하는 말이 나오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약 3:10-14)”고 하듯, 이 세상 모든 피조물중 인간을 제외하곤 한 구멍에서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이 동시에 나오게 하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어떤 것들인지 가만히 귀 기울여 보라. 내 속에 무엇이 채워져 있는지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탐색해 보라. 그리고 내 입에서 단물만 나오길, 살리는 말, 생명의 말, 격려의 말만 나오길 진심으로 원한다면 지금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보라.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될것이다.

by 김영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