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29, 2010

블로그 공사중

블로그 공사중입니다.

원래 블로그 내용을 백업해 놓은 파일이 정상적으로 백업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서버상의 모든 블로그 자료들을 삭제 후 다시 인스톨해 백업을 하니 실제 블로그 재산의 10%도 복구해낼 수 없었습니다. 20년에 걸져 쓰여진 글들과 자료들이 모두 날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티스토리(tistory.com)에 블로그를 하나 만들어서 그곳에 예전에 백업한 것을 이식해 놓은것이 기억이 나서 티스토리 블로그 자료를 백업해 이곳에 다시 이식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자료들을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할레루야 !!!
 
제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쓰던 글들은 옛 기억과 감정을 되살려 낼 수 있는 유일할 도구들이기에 참으로 소중한 자산입니다. 다음부터는 백업할 때마다 실제로 잘 백업이 되었는지 꼭 확인을 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김영기 선교사 드림.

Wednesday, October 27, 2010

바람이...

아내와 아이들 모두 함께 차를 타고 나가 잠시 Family time 을 가졌습니다. 타운라인을 달리는 동안 중부의 전형적인 세찬 바람이 불어 차가 흔들립니다. 도로가에 자라고 있던 갈대 하얀 씨앗들이 마치 눈처럼 세찬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져 갑니다. 저 씨앗들이 날아가 새로운 장소에 뿌리를 내릴겁니다.

바람은 생명과 죽음 모두를 가지고 다닙니다. 바람이 불어 새로운 생명의 씨앗들이 이동하고 그 바람을 타고 새들도 세상 곳곳으로 날아가 생명을 잉태합니다. 그 바람이 구름을 살찌우고 비를 낳게합니다. 바람은 생명의 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바람은 죽음을 준비시킵니다. 세찬 바람에 큰 나무가 힘없이 쓰러집니다. 거친 파도가 일어 폭풍이 되고 바닷속을 새롭게 뒤집어 놓습니다. 바람은 죽음을 품어서 자연 본래의 옷을 입게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은 마치 성령과 같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죽어야 할것들이 죽게 되고 살려야 될 것들을 살리게 됩니다. 성령이 바로 생명을 몰고 다니며 동시에 죽음을 준비하고 보게합니다.

가족들 모두 집에 내려주고 도서관으로 걸어오는 길 내내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 이제는 가지만 남은 커다란 나무들을 봅니다. 낙옆들을 죽음으로 인도하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게 하는 바람의 순리를 봅니다.

저는 성령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성령이 주는 거칠고 동시에 부드럽기 그지없는 생명과 죽음의 향연을 누리고 싶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제 영에 끊임없이 불어 내 안의 내가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뿜어올라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바람이 붑니다.

성령이 붑니다.

Tuesday, October 26, 2010

가을이 춤을 춥니다.

일리노이 주 시카고 북쪽의 가을은 참 짧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디어필드(Deerfiled)는 오래된 낙옆송들이 많이 있는데 여름 끝자락부터 온갖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기 시작해 가을이 오는듯 싶을 때 가장 아름다운 빛을 냅니다.

그 나뭇잎의 기가막힌 색조를 보면서 하나님의 이외엔 자연속에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빛을 만들어낼 분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오늘은 비가 왔습니다. 하늘은 회색빛으로 변해가고 구름들이 몰려옵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거리의 떨어져있던 낙옆들이 하늘을 날기 시작합니다. 온갖 오색 찬란한 낙옆들이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바람에 어깨춤을 추며 흥이 납니다.

나무위에 있던 낙옆들은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겨울을 맞이하러 먼 길을 떠나고 없을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문턱에 본 나무들의 다양한 표정에 내 마음에도 차분한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가을이 춤을 춥니다.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Monday, October 25, 2010

교통신호 위반 고지서를 받았습니다.

시험 공부를 위해 도서관에 가는 길에 편지함을 열어보니 빨간색깔의 조금은 도전적인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열어보니 2주전 금요일 교역자회의를 마치고 늘 습관처럼 지나가던 밀워키와 던디 길이 만나는 교차로를 지나 집으로 오는 길에 교통신회 위반을 했다는 위반 및 범칙금 고지서였습니다.

미국 교차로에서 우회전은 '빨간불에 정지' 라는 표지판이 없으면 교통 상황을 보고 자유롭게 우회전을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교통범칙금이 정말 비싸기 때문에 가난한 유학생 이라는 이유뿐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도 교통 법규를 잘 지켜왔습니다.

교통신호 위반 고지서에 사진과 시간, 장소등이 매우 상세하게 나와있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그곳에 명확하게 명시된 표지판이 없었습니다. 물론 자주 그곳을 통해 집으로 왔기 때문에 더 자세히 기억을 할 수 있지요.

$100 (약 10만원)의 범칙금이 얼마나 눈에 크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차라리 교통 경찰이 현장에 있었다면 명확하지 않은 교통 표지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어필을 했을텐데 무작정 기계장치에 의해 촬영된 사진과 시간 장소가 벌금을 선언하니 마음이 아프고 답답합니다.

고지서에는 세가지 선택 사항이 나와 있었습니다. 첫째, 돈을 군말없이 낸다. 둘째, 나를 항변하는 이유를 종이에 작성해서 보낸다. 셋째, 판사에게 내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청한다.

저는 세번째를 선택해서 고지서를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나는 교통 신호 위반을 고의적으로 한적이 없음을 선언하고 싶은 마음이고 둘째는 100달러의 돈을 명확하지 않은 교통표지판으로 인해 발생된 고의성이 없는 위반 범칙금으로 내기 싫어서 입니다. 셋째는 미국 법 체계와 법정 그리고 법 집행의 공정성이 어떻게 연계되어있는지 경험하고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 미국 사회의 조금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교 공부로 바쁘지만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10일 안에 제 요청에 대한 답변서가 제게 도착한다고 하니 어떻게 제 이야기를 듣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지 그 과정을 잘 경험해 보겠습니다.

시카고에서..

Saturday, October 16, 2010

앞서 가시는 하나님, 따라가는 우리

여호수아(Joshua) 3장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언약괘가 움질일 때 우리가 머물며 하고 있던 일을 떠나 하나님의 언약괘를 따라 가라고 명령을 한다.  그 언약괘를 따라가기로 결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어느길로 가야할지를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When you see 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your God, and the Levitical priests carrying it, you are to move out from your positions and follow it. Then you will know which way to go, since you have never been this way before.)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번도 가본적이 없던 새로운 곳에서도 갈길을 보이시고 이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조건은 언제나 변함없이 주님께서 앞서 가시고 우리가 따라 순종함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이다.

3장 9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명령은 바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Come here and listen to the words of the Lord your God.)" 이다.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이유 그리고 자원들을 가지고 결정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최우선으로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에 따라 순종함을 결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괘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일하심이 우리를 앞서서 일어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라고 3장 11절에서 확증해주고 있다. (See, 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of all the earth will go into the Jordan ahead of you.)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페턴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당신의 의지와 뜻 그리고 목적을 알기를 원하시며 그것을 귀 기울여 매 순간 듣기를 원하신다. 그것을 듣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첫번째 일은 바로 머무는 것이며 둘째, 듣는 것이며 셋째, 주님이 움직이심을 감지하는 것이며 넷째, 두려움 없이 순종함으로 따라 가는 것이다.

가장 쉬운듯 하면서도 가장 어렵고 지속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이다. 주변의 상황과 환경, 사람의 소리, 그리고 우리의 인간적인 경험들이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정중동하며 서 있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다. 이 때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들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하나님이 없으신듯한 외로움, 홀로됨의 시간들이다. 이 홀로됨(Solitude)의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영의 확장의 시간이다. 그러나 이 순간을 인내하지 못함으로 경솔하게 스스로 움직이거나 뒤돌아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머뭄의 시간을 지나고 나면 반드시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말씀하시며 그 세미한 음성을 우리가 듣게 된다. 비록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듣지 못할 때도 있고 때로는 들었지만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간의 기다림과 홀로됨의 이유가 명쾌하게 이해되고 우리 안에 새로운 힘과 자유함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뿌리가 조금더 깊어지고 넓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 때 우리의 경험과 계획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를 성급하게 충동하게 된다. 이 충동에 이끌려가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위험 천만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영으로 보고 감지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앞서 일하시고 움직이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보다 앞서 가는지 모를뿐 아니라 앞서 스스로 행동하고 일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일하고 계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의 힘이 우리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앞서 행하시는 주님을 봄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앞서 움직이시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 갈 때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순종의 힘이 솟아나 행동할 수 있듯이 우리 안에 믿음과 순종의 발걸음을 시작케 하신 이도 하나님 아버지 이시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 그 생각 자체가 이미 하나님보다 앞서가려는 충동이며 불순종이 아닌가.

우리에게 머물라 하시고, 말씀하시며, 먼저 앞서 일하시고 길을 열어가시는 하나님을 통해 믿음이 날마다 새롭게 솟아나고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며 주님을 따라가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더불어 그것을 누리는 우리를 보시고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 영광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