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y 24, 2016

원온원 (One on One) (5월 24일 한국일보 칼럼)

사방으로 걸어다니기 시작한 갓 돌지난 막내 아들과, 종잡을수 없는 사춘기에 접어든 열세살인 첫째 딸,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있는 둘째와 셋째까지 총 네 아이와 함께 사는 아내와 나는 가능 하다면 매일 밤 시간을 내서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여러 주제 중 하나는 아이들의 성장과 더불어 나타나는 변화에 관한 내용이다.

이렇게 아내와 대화를 나눈후 의사표현이 가능한 세 아이들을 위해 선택한 접근 방법은 원온원 (One on One) 이다. 보통 두 사람이 일대일로 시간을 갖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원온원이라고 칭하는데, 단순히 표피적인 대화가 아닌 높은 수준의 대화(Qualitative Conversation)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며 나타나는 육체적 정서적 변화는 성별에 따라 그리고 나이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한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아이가 전혀 다른 양상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한 부모로부터 태어났음에도 네 아이가 각각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과 정서 그리고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 아이와 어우러져 온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일대일로 따로 시간을 내 원온원을 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따로 따로 집중된 질높은 시간(Quality Time)을 통해 아이들의 지적, 육체적, 정서적, 영적 성장을 더 깊고 넓게 그리고 유연하게 도울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들은 자신이 방치되지 않고 부모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소속감과 강한 자존감을 취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단순히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함께 놀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온원(One on One)은 함께 일대일로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열린 공간을 확보하고 적극적 듣는 행위(Active Listening)와, 화자(話者)의 감정과 기억 공간속에 청자(聽者)가 함께 서 있다는 적극적 동감(Active Empathy)을 사용함으로써 깊은 차원의 내면적 이해와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사춘기 아이와 이제 여섯살인 아이에게 적용하는 원온원의 강도는 다르지만 적극적 듣기와 동감을 언어적 행위로 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아이와 아빠가 또는 아이와 엄마가 최소 30분에서 한시간 이상을 단 한명의 아이만 따로 떼어 집중해 단둘이 순도 높은 시간(Quality Time)을 보내는 것이다. 

이런 원온원(One on One)은 비단 아이들 뿐만 아니라 성인 어른들의 관계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직장 공동체 관계 속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이웃과의 관계, 교회 공동체나 직장 공동체의 관계가 동일한 방식과 다른 강도의 원온원을 통해 더욱더 깊고 넓은 차원의 상호 이해와 신뢰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마다 보는 부부들도 일부러 단둘이 앉아 적극적 듣기와 동감이 포함된 짧더라도 높은 수준의 대화 시간인 원온원을 가져야만 한다. 또 아무리 바빠도 한달에 두번은 짧은 시간이라도 아이들과, 이웃과, 그리고 교회 공동체, 직장 공동체 구성원과 일대일로 원온원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본질적으로 원온원(One on One) 관계를 추구하고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천지만물이 창조된 인류의 시작점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죄로 인해 그 관계가 깨진 후에도 원온원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 행보는 모세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과의 관계속에서 강력하게 나타났다. 또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깨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의 관계속에서 원온원을 사용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 원온원을 적용하는 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리더십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적극적 사랑의 표현인 원온원(One on One) 관계의 열매가 얼마나 풍성한지 백마디 말이 필요없다. 지금 당장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시도해 보라.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 링크:
http://chicagokoreatimes.com/%EB%AA%A9%ED%9A%8C%EB%8B%A8%EC%83%81-%EC%9B%90%EC%98%A8%EC%9B%90-one-on-one/

Wednesday, May 18, 2016

사랑의 힘 (The power of love) (5월 17일 한국일보 칼럼)

화창한 오월의 푸른 하늘 아래, 둘째 아이 손을 잡고 걷는 동안 아이의 작은 샌들과 내가 신은 샌들 끝으로 하얗게 드러난 발가락들이 시소를 탄다. 아이의 발끝을 장난스럽게 따라가는 시선 위로 한 단어가 떠올랐다. "삭제가 불가능한", "지워질 수 없는 (incapable of being erased)" 뜻을 지닌 “언이레이져블(Unerasable)” 이었다. 이 단어는 심각한 연탄가스 중독과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기억을 상실해버린 내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단어이다.

1980년대 겨울밤, 온가족이 한 방에서 잠을 자다 연탄가스 중독(Carbon monoxide poisoning)으로 조용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연탄 가스로인해 온 몸의 힘이 빠지고 정신이 없었던 아버지가 죽을 힘을 다해 가족들 하나 하나를 마당으로 끌어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연탄가스 중독(Carbon monoxide poisoning)으로 인해 뇌로 가야할 산소 공급이 중단돼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이전의 대부분의 기억이 사라져 버렸다. 어린시절 내 자신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기억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이 없었지만, 정작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성경공부를 하며 어린시절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것을 써보라고 할때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것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뇌세포가 손상되어 대부분의 기억이 하얗게 지워져 버렸는데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몇 개의 단편적인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몇 개의 남아있는 기억 모두가 아버지께서 나에게 사랑을 표현했던 순간들이다.

이제는 팔순을 바라보는 아버지께서 아직 삼십대 때 직접 소나무를 깎아 팽이를 만들어 어린 내 손에 쥐어주고 함께 놀아주며 웃어주시던 장면, 아버지께서 직접 만들어준 연을 날리다 줄을 놓쳐 울고 있을 때, 젊은 아버지께서 그 연을 잡으려고 해변을 뛰어가던 모습 등이 마치 고화질 흑백 영화처럼 생생한 기억의 파편으로 남아있다. 공통적인것은 모두 아버지께서 아들인 나에게 표현했던 평범한 사랑(Love)의 장면들이다.

연탄가스가  열두살 이전 기억들을 완전히 삭제(Complete Erasing)해 버렸지만 아버지께서 표현했던 사랑의 순간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40대인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사랑(Love), 특히 아버지의 사랑 (Father's love) 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최신 뇌(Brain)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사랑(Love)이라는 감정을 관장하는 곳은 인간 뇌의 가장 깊은 곳 중심에 위치한  소뇌편도(Amygdala)라고 한다. 뇌가 외부 충격이나 감염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어도 이 소뇌편도(Amygdala) 안에 담고 있는 사랑(Love)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강력하게 남는다고 한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육신의 아버지, 한 인간 존재에 의해 표현된 사랑조차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진데(Unerasable), 하물며 온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어떠할지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 38-39) 외치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그 극진하신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은 평생 단 한 순간도 그것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코,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사랑을 지우는 것이 불가능한 (incapable of being erased) 것이다.

이런 사랑의 힘(The Power of Love)을 단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은 아내, 남편, 자녀들 더 나아가 이웃과 교회, 직장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언이레이져블(Unerasable) 하기 때문이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 링크:
http://chicagokoreatimes.com/%EB%AA%A9%ED%9A%8C%EB%8B%A8%EC%83%81-%EC%82%AC%EB%9E%91%EC%9D%98-%ED%9E%98the-power-of-love/


Wednesday, May 11, 2016

낯선 땅에서의 관계 (5월 10일 한국일보 칼럼)

"선교사로서 한국에 살면서 가장 어렵고 괴로웠던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한국 예수전도단(YWAM Korea)을 시작했던 오대원(David E. Rose) 목사에게 던진 누군가의 질문에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의 그 어떤것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간의 갈등, 시기, 질투, 비교, 반목 등이 나를 가장 어렵게 만들었었습니다."

이것은 오대원 목사만의 고백이 아니었다. 아내와 내가 인도(India)에서 선교사로 사는 동안 인도 사람, 음식, 날씨, 그외 어떤 열악함도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한국인 선교사들간의 긴장과 관계의 깨짐, 열등감을 가진 선교사들의 비교의식 등이 연출하는 살벌한 분위기가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다행히 아내와 나는 여러 나라에서 온 선교사들로 구성된 국제 예수전도단(Youth With A Mission) 베이스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사역 함으로써 조금은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었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덤벼오는 사람들에 대해선 속수무책이었다.

대부분 팀이 아닌 단독 선교사로 선교지에 와있던 사람들은그런 묘한 갈등과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동안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우울증에 걸리는 이도 있었다. 같은 교단 출신끼리 뭉쳐 다니다가 자기들끼리 또 관계가 깨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그중엔 원하지 않는 긴장과 갈등을 견디지 못해 선교지를 완전히 떠나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슬픈 일은 비단 선교지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피부 색깔이 다른 사람으로 가득한 타국에 나가 살고있는 모든 이민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선진국인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들과 유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학위를 마치고 하루속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주 목적인 유학생 가족들뿐만 아니라 정착하기로 결정했던 이민자들도 굳이 자신들이 속해있는 국가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타 인종과 관계를 만들고 확대해가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당장 먹고 살수 있고, 한국어만 사용해도 생활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주변의 몇몇 한국인들과만, 또는 같은 학교 출신, 교단 출신, 고향 출신, 그리고 같은 교회 사람들만의 좁은 교제의 관계를 갖게 된다. 극단적으로는 집, 교회,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터와, 음식점, 도서관만 오가는 이민자와 유학생도 발견하게 된다.

그 결과로 조사된 공통된 특징은 지속적인 긴장과 갈등, 재정의 어려움, 비교, 열등감, 우울증, 자기비하로 인해 이민생활과 유학을 당장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까지 겪게 된다. 그나마 집 밖으로 언제든 나갈 수 있는 남편들과 달리 배우자들은 작게는 2배에서 3배에 달하는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고 보고 되었다. 이로인해 잦은 부부싸움을 하게 되고 때로는 이혼에까지 이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가까이 있는 한국인 이민자들과 미묘한 갈등, 비교하는 마음, 열등감이 작용해 완전히 관계를 단절해버리거나, 무시해 버리기, 왕따 만들기, 가장 가까운 몇 사람 또는 가정에 집중하기 등의 악순환을 선택하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 같은 유치함을 선택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민자들은 어떻게 이것을 방지하고 개선할 수 있을까? 최우선 순위는 먼저 자신이 넘쳐 흘러야만 한다. 당장 영적, 지적, 육체적, 재정적, 관계적 자신감이 넘쳐나지 못하니 늘 주변에 그것을 요구하고 다른 무엇인가로 채우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 채워주지 못한다. 가장 가까운 아내도, 남편도 스스로 메말라 있어 서로에게 요구만 할 뿐 채워줄 수 없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당장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만 한다. 자신의 현재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깨닫도록 조명해줄 하나님이 필요하다. 때로는 정기적인 쉼과 가족만 따로 홀로있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영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 필요하다.

두번째, 스스로 내적으로 채워지기 시작할 때 가까운 이웃들과 교제의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옆집 이웃의 여러 인종과 교제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당장 말이 통하지 않아도 된다. 관계하고자 하는 의지와 태도, 마음이 다른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혀로 만들어지는 언어를 앞서는 눈빛, 마음, 태도, 음식의 언어가, 다른 인종과 문화 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유대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면 낯선 땅에서 이민자로 살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힘드니, 집착해서 내 편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 "내 편, 내 편" 함으로써 그 관계는 속박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 관계 속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된다. 그리하면 나도 모르게 왕따 놀이를 하게 된다.

세 번째, 이런 관계의 확장과 더불어 육체적 채움도 동시에 필요하다. 잘 쉬고, 자고, 먹어야 하며, 지속적인 운동도 필요하다. 이때, 좁고 독점적인 관계를 형성해 쉬고, 자고, 먹고, 운동을 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반드시 그런 경향성을 떨쳐 버리고 다양한 관계 안으로 스스로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할 때 더이상 현재 머물고 있는 다른 문화, 언어, 인종이 있는 장소가 멀고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을것이다. 더불어, 몇몇 되지 않는 한국인 이민자 이웃들과도 오히려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 서로의 경계(Boundary)를 지켜주는 유쾌한 관계를 유지하게 될것이다.

당장 시도해 보라. 열매를 맛볼것이다.


by 김영기 목사

Thursday, May 5, 2016

사랑의 언어 (Love Language) 5월 3일 한국일보 칼럼

아내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할 때였다.  삶에서 가장 춥고 힘들었던 때, 따뜻하고 기뻤던 기억, 예수님을 만났던 순간, 가정과 친구들, 그리고 남들이 잘 모르는 감추고 싶은 연약함에 대해 조심스럽고 정직하게 서로에게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에게 나눈 연약함의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 소위 "콩깍지가 낀" 상태로 곧 결혼하게 되었다.

콩깍지 껍질이 얼마 지나지 않아 벗겨진다고들 하지만, 아이 넷인 지금까지도 아내가 예뻐보이고 사랑스럽고 귀여워 보이는 것을 보면 콩깍지가 낀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의 안경이 생긴것이리라.

그렇다고 결혼 초부터 서로 짊어지고 가기로 결정한 각자의 연약함의 십자가가 사라졌다거나 가벼워 졌다는 것은 아니다. 종종 그 십자가가 가벼워지거나 혹은  사라질거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신혼 초에 속히 인정하고 포기했다.

그래서 아내와 내가 선택한 방법은 각자 사랑 받는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가 무엇인지 열린 대화를 통해 발견해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를 지속적으로 상대방에게 사용하고 표현하는 것이었다.

남편인 내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가 칭찬(Encouragement)과 음식(Food) 임을 알게된 아내는, 무엇을 부탁할 때마다 칭찬을 양념으로 버무려서 내놓았다. 예컨데,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할 때도, "어쩜 당신 어깨는 이리도 넓어요, 정말 듬직해...멋져하며 배웅을 한다. 문 밖엔 큼지막한 쓰레기 봉투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쩜 당신은 손재주가 좋아...역시 공대 출신이야.... 이것도 고쳐주고..저것도 고쳐주고..., 고마워" 하며 감사를 표현한다. 곧 집안의 소소한 것들을 고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또 무슨 문제가 있거나, 갈등이 생길 때 기꺼이 자신이 왜 속상했는지 마음을 나누고 난후 맛있고 풍성한 음식(Food)을 만들어 내 놓는다. 그리고 늘 남편의 의견을 먼저 물어봐주고 결정을 한다. 아내가 남편의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인 칭친과 격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남편의 방식으로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되돌아 보면 대부분의 결과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있는 것을 본다.

아내의 사랑의 언어는 경청과 격려 임을 알게된 후 아내가 말 할 때마다 진지하게 듣고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다, 이쁘다, 사랑스럽다, 귀엽다, 날씬하다, 똑똑하다"는 칭찬의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를 지속적으로 진심을 담아 표현 해왔다. 사실 그것은 단순한 듣기와, 칭찬이 아닌, 아내의 속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 이기 때문이다.
종종 다툼으로 인해 화가 나서, 그 반대의  못된 말을 했다가 아홉번 잘한 것을 모두 도루묵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지만, 결혼 기념일의 숫자가 늘어 갈수록 그런 실수는 줄어들었다.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를 내 방식이 아닌 상대방의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표현함으로써, 아내는 더욱더 사랑스럽고, 우아해지고 있다. 더 지혜로와지고 영적 분별력이 깊고 넓어졌다. 나이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소유해가고 있다. 유머가 넘쳐나고, 자신감이 있으며, 주변의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며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자아상이 높아지고, 영적으로, 지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모나고 문제투성이 남편인 나 자신도 변해가고 있고 그런 부모를 옆에서 보고 자라는 아이들도 선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관계라는 토양위에 사랑의 언어를 심고 성장해 가시적인 열매를 얻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잠시라도 멈추면 순식간에 오랜동안 쌓아온 것이 와르르 무너지고 도루묵이 된다. 그래서 기꺼이 사랑의 언어 표현을 생활화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를 상대방에게 표현하면 할수록 오히려 내 속사람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해가는 자기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돈도 시간도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달고 풍성한 열매를 평생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당장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사용해 보라.


by 김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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