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는 독특한 건축 디자인과 기술로 지어진 빌딩들로 유명하다. 시카고 마천루를 이루는 건물들중1969년에 지어진442미터 높이에 108층인 윌리스 타워(Willis Tower)가 있다. 47년 동안 시카고의 세찬 바람과 추위에도 끄덕없이 하늘을 찌를듯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이 빌딩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높은 빌딩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곧게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 건축물은 그것이 1층 건물이든 100층 이상의 빌딩이든지 반드시 다림줄(Plumb Line)을 사용해 기준을 만들고 그것에 맞추어 뼈대를 세우고 벽돌을 쌓게 된다.
다림줄(Plumb Line)은 가늘고 긴 줄 끝에 작고 무거운 쇠덩이를 묶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풀어놓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 지구 중력에의해 반드시 지표면과 수직을 이루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축물은 모두 이 다림줄이 보여주는 수직을 기준으로 삼아 세워져야 한다. 이 다림줄을 기준으로 세워지지 않은 건축물은 한쪽으로 치우쳐 반드시 무너질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도 인생(人生) 이라는 이름의 건축물을 세워간다. 사람마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삶이라는 빌딩을 만들어 간다. 이 삶(人生)이라는 건축물을 세워갈 때도 다림줄(Plumb Line)을 기준 삼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천지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인간이 불순종함으로 죄가 들어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人生)의 다림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다림줄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살지 않으면 우리 인간의 삶은 언제든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추풍낙옆과 같은 신세가 된다.
죄(Sin)가 인간에게 들어온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두려움, 분노, 외로움, 약함, 좌절, 원망, 예민함, 복수심, 강함, 무관심, 사랑 결핍, 무기력함, 열등감, 낮은 자존감, 시기, 질투, 비교, 교만, 복수심, 반항, 가치관의 혼동, 우울증 등으로 가득차 온전한 인생이라는 건축물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삐쭉빼쭉 울퉁불퉁 튀어나온 적개심, 자만심, 의기양양, 우월의식,열등의식, 경쟁의식, 군림함, 완고함, 조작함(Manipulation), 고집불통(Stubborn), 교육불능(Unteachable), 망상, 비통함, 억울함, 비판, 지배욕, 소유욕 이라는 이름의 벽돌로 세워진 인생(人生) 빌딩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않고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건물이 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언제든 곧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 비참한것은 위에 언급한 벽돌들로 덕지덕지 쌓아올린 보기 흉물스러운 삶(人生)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을 향해 성경의 아모스 7장 7절에서 8절은“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띠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하며 심판의 잣대, 하나님의 기준으로서의 다림줄을 통해 우리 인간의 내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조명해주고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다림줄은 삐쭉빼쭉 튀어나온 인간 죄의 벽돌들을 말씀의 다림줄을 기준삼아 제자리로 위치시키고 빼내 올곧게 되도록 도와준다. 그 결과, 그 다림줄을 붙잡고 계시는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잠잠히 눈을 감고 하나님의 다림줄을 도움삼아, 내 인생(人生)의 건축물은 삐뚤 빼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벽돌로 잘 세워져 있는지 돌아보라. 언제든 무너져 내릴것같은 위태로운 상태라면 즉시 예수님께 달려가라.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것이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 링크:
http://chicagokoreatimes.com/%EB%AA%A9%ED%9A%8C-%EB%8B%A8%EC%83%81-%EB%8B%A4%EB%A6%BC%EC%A4%84plumb-line/
“개똥이 엄마”, “남산 댁” “아무개 동생” 등의 표현을 텔레비젼 드라마 속에서 뿐만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사람을 부르거나 호칭할 때 사람들이 종종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한 개인이 다수보다 두드러지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공동체적(Collectivistic) 사회 분위기가 사람을 부를 때 각 개인의 고유한 이름을 호칭하지 않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또한 남성 우위 유교 문화 속에서 여성이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방편으로 직접적인 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대리적 호칭이 선호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미국 사회처럼 개인주의적 (Individualistic) 문화 환경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각 사람의 이름을 놔두고 아이의 이름을 붙여 “아무개 엄마”라 부르고, 살고 있는 동네의 이름을 붙여 “무슨 동네 댁” 또는 “누구 동생” 이라고 부르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인간이 인식하고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계는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다. 심지어 하늘에 떠 있는 별들도 그것을 명시하는 고유숫자 또는 고유의 별자리 이름을 부여받아 그대로 사용된다. 심지어 땅에 피어 있는 초목들도 자기의 이름(학명)으로 불리운다. “소나무” 보고 “은행나무 옆 나무” 라고 부르지 않고, “장미꽃” 보고 “개나리꽃 옆집 댁”, 또는 “아무개 엄마 꽃” 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창조될 때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창 2: 19) 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에서는 종종 그 이름을 바꿔 부르며 그 새로운 의미를 따라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아브람이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가 민족의 어미라는 뜻의 “사라” 로 이름이 바뀌어 불렸다. 또 야곱이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의미의 “이스라엘” 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의 후손들은 좌충우돌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살게 되는 것을 역사를 통해 보게 된다.
그만큼 불려지는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개 엄마”, “누구의 동생” 이렇게 불렸던 사람중에는 자기 자신은 없어지고 다른 존재의 장식품처럼 느끼며 슬픈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컨데, 공부 잘하는 형이나 누나와 함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다니던 동생 중에는 선생님들이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아, 너 아무개의 동생” 하며 늘 “누군가의 동생”으로 불리다 보니, 성인이 되서도, 결혼한 후에도 늘 열등감과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단 한번도 자기 이름으로 불린적이 없었다는 사람도 있다.
또 결혼후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늘 “아무개 엄마” “무슨 댁”으로 불리며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 하느라 눈코뜰새없는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성도 있다는 보고다.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과 상대방의 이름을 정중하게 불러주기를 즐겨한다. 결혼한 상대방에게 누구 누구 엄마가 아닌, 여보, 당신, 허니 또는 이름을 정겹게 불러 주는 것을 통해 더욱더 상대방이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이름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라. 그리고 그 이름 뜻에 걸맞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고 고백한 김춘수의 시처럼 이름을 불러주라. 꽃이 되고 의미가 되는 아름다운 사람을 보게 될것이다.
by 김영기 목사
한국일보링크:
http://chicagokoreatimes.com/%EB%AA%A9%ED%9A%8C-%EB%8B%A8%EC%83%81-%EA%B0%9C%EB%98%A5%EC%9D%B4-%EC%97%84%EB%A7%88/
갑각류 절지 동물이나 딱딱한 겉껍질(외피)을 가진 곤충들은 속살이 어느정도 자라면 외피를 벗는 탈피의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 이 과정을 통해 완전히 다른 형태의 성장으로 가는 것을 한자어로 변태(變態), 영어로는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이라 표현한다.
변태 과정을 거치는 가장 흔하고 가까운 예는 잠자리 애벌레인 학배기 그리고 호랑나비 애벌레를 들 수 있다. 학배기는 아가미를 갖고 물 속에서 살다 뭍에 올라와 변태(變態) 과정을 거쳐 아름답고 투명한 날개로 하늘을 날아 다니는 모양으로 환골탈태 한다. 호랑나비 애벌레도 많은 다리로 기어 다니다 나뭇가지에 고치 형태로 매달린체 변태(Transformation)를 하게 된다.
보기에 매우 흉칙해 보이는 애벌레들이 트랜스포메이션(變態) 과정을 통해 선녀 옷 같이 얇고 투명하며 가볍디 가벼운 날개로 산들 산들 바람을 타고 날아 다니는 잠자리와, 오색 찬란하고 화려하기 그지 없는 큰 날개를 가진 호랑나비가 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자연 법칙이다.
이와 비슷하게 만물의 영장인 사람(人間)도 변태(變態)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트랜스포메이션(變態)을 경험하고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다르다. 더군다나 인간에게 일어나는 변태(變態, Transformation)는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닌 인간 내면, 다시말해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 점이다.
변태(變態)라는 한자는 말씀 언(言)을 중심에 품은 변할 변(變) 과 가능하게 하다는 뜻의 능할 능(能)을 마음심 (心) 이 떠받치고 있는 모습태(態) 의 조합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言)을 통해서만 진정한 트렌스포메이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 학문과 철학 그리고 지혜는 마치 옷을 입듯 각 사람의 세계관에 걸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정한 내적 변화가 아닌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할 변(變)자를 따르는 모습태(態)는 반드시 마음(心)이 기반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心)이 완전히 새롭게 되어 움직이지 않으면 내적, 영적 모습이 바뀌는 것을 가능하게(能)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12장 2절은 마치 변태(變態, Transformation)라는 한자어를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 놓은듯한 놀라운 성경 말씀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al of your mind, that by testing you may discern what is the will of God, what is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로마서 12:2).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죄(Sin)로 인해 어그러지고 찌그러진 세상에서 찌그러지고 상한 영적 상태로 살아가며 문화와 기술 그리고 철학과 지식의 옷을 걸치며 단순히 세상을 본받았을 때(being conformed) 마치 최첨단의 신식, 완벽한 사람이 된듯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言)으로 마음(心)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Being Transformed, 變態)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能)되지 않는다면, 겉 모양이 아무리 화려하고 보기 좋아도 그 사람의 속 사람은 여전히 보기 흉한 애벌레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시카고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로 변태(變態, Transformation)를 경험하고 그 열매를 두 눈으로 보고 맛보는 일이 사방에서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by 김영기 목사
모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품에서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한살이 되면 보통은 젖을 떼고 걸음마를 시작한다. 말을 하기 시작하고 세살이 될 때까지 부모의 전적인 보호아래 자라는 것이 일반적인 아이들의 삶이다.
이 때 엄마의 젖을 떼고 자라는 과정에서 아이들 안에 안정감을 주던 엄마의 품을 대신해 줄만한 무엇인가를 찾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 때 아이들이 선택한 그 어떤 것(Object)이 있는데 보통은 아기 때 덮어주는 작은 담요일 때가 많다. 이것을 우리는 안정 담요(Comfort Blanket) 또는 안전 담요(Security Blanket) 라고 한다. 때로는 아기(Baby)가 유아(Infant)로 전환하는 과정에 일시적으로 나타나기에 전환 담요(Transitional blanket)라고도 한다.
아이들마다 천차만별이어서 어떤 아이는 냄새 나고 너덜너덜해진 곰 인형을, 또 어떤 아이는 작은 플라스틱 장난감을 안정 물체(Comfort Object)로 삼는다. 그래서 그런 물건을 일반적으로 안정담요(Comfort Blanket)라고 통칭한다.
안정담요와 더불어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빠는 모습은 매우 일상적인 모습이 틀림이 없다. 그런데 어린 아이 시기에 엄마의 품으로부터 떨어지는 불안정한 이 시기를 통과후 반드시 다음 단계의 성숙으로 자라야만 하는 속사람이 자라지 않는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사춘기를 지나 청년의 시기 그리고 결혼 후 성인의 시기를 거쳐 오십대 육십대의 노년의 시기에 이르러서도 형태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아기처럼 안정 담요(Comfort Blanket)를 찾아 다니고 그것을 취하지 못하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을 보통 성인아이(Adult Child)라고 한다. 성인의 성숙함을 이루어야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성향과 행동을 벗어버리지 못한 ‘성인아이’들은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다양한 형태의 안정 담요를 가지고 있다.
예컨데, 자신의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늘 자신의 주변에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늘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한다. 단순히 몇 사람으로 구성된 모임 안에 언제나 자신이 속해 있어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친밀하고 깊은 교제 관계가 아니더라도 얕지만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관계 전선에 아무 이상이 없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 만약 관계의 깊이와 상관없이 어느 관계든지 이상이 있는듯하면 불안해 한다. 이런 사람에겐 주변 인간 관계가 안정담요(Comfort Blanket)인 샘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모임을 만든다. 어디를 가든지 주도적으로 다양한 모양의 모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취득하는 것이다.
이민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안정담요의 형태는 바로 자리(Position)이다. 언어와 문화, 피부색, 그리고 사회 구조가 다른 이민 사회에서 내적 안정감과 성취감을 취득할 수 있는 제한된 통로가 바로, 같은 인종(Ethnic Group)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Group, Community)안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것이다. 예컨데, 이민 교회와 같은 믿음 공동체에서는 자신의 내적 신앙의 성숙함과 상관없이 장로, 권사, 집사등의 직분을 추구해 얻는 것이 모양만 다른 안정 담요 (Comfort Blanket)의 역할을 한다. 모두가 그런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는 군소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이름도 알 수 없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갑자기 나타남을 통해 안정 담요를 취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모임들을 만들어서 회장, 부장, 대표, 고문, 이사 등의 자리(Position) 를 만들어 내 그것을 취한 성인아이(Adult Child)들이 존재한다.
상상해보라, 멋진 옷을 입고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성숙한 얼굴을 한 성인이 담요 한장을 손에 꼬옥 쥐고 엄지 손가락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을. 내 안에 안정 담요(Comfort Blanket)를 추구하는 어린 아이가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 볼일이다.
by 김영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