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18, 2016

네가 나를 아느냐? (4월 12일 한국일보 칼럼)

마음까지 통할 수 있는 ‘절친한 친구’를 표현할 때 ‘지음(知音)’ 이라는 고사성어를 종종 사용한다. 이렇게 서로에 대해 잘 알고 마음까지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축복임이 틀림없다.

이 고사성어의 배경인 중국 춘추시대(春秋時期)와 비교한다면 초고속 정보통신 시대인 지금은 전세계 어디서나 핸드폰을 사용해 서로의 얼굴을 실시간으로 보며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당연히, 옛 시절보다 더 깊고 넓게 그리고 더 많은 절친한 친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그와는 반대로 외로움을 호소하는 홀로족들이 전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런 현상과 더불어 페이스북, 트위터등 인터넷 사회 관계망(Social Networking Sites)을 통해 가상공간속(Online - Cyberspace) 친구를 만들고 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런데 0 1의 비트(Bit)를 기반으로한 가상공간속의  인간관계는 얼굴을 보고 상호작용할 수 없는 단절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군가를 잘 안다고 자신있게 표현하는 것을 볼 수있다. 이 때 잘 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무개에 관해 안다 (Knowledge about someone)와 아무개를 안다 (Knowledge of someone)를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무개에 관해 안다는 것은  A 라는 사람에 대해 그의 친구나 이웃 또는 다른 정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데, 유명 연애인의 혈액형, 가족관계, 취미, 좋아하는 것등을 꿰뚫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얹은 정보로 그 사람을 아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대조적으로 아무개를 안다는 것은 B라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대화도 하고 식사도 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 대상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의 기본 구성인 아내와 남편의 관계 더 나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관계의 앎(Knowing)에 관해 혼동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어떤 앎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해 더욱더 깊은 공허와 외로움 그리고 혼란속에 머물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스스로 성경을 잘 안다는 사람을 만난적이 있었는데,  C 신약박사, D 구약박사, L 유명 설교자가 말하는 성경속 하나님에 대해 청산유수처럼 읇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논리의 바탕이 되는 앎(Knowing), 자신이 직접 읽고 묵상하며 삶속에서 경험된 하나님에 관한 앎 (Knowledge of God)이 아닌, 제 삼자를 통해 얹어진 앎(Knowledge about God)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내 아내와 자녀들에 관해 옆집 사람의 입을 통해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분주함으로 인해 가장 가까워야할 하나님은 물론이거니와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딸, 엄마와 아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직접적 앎(Knowledge of )이 아닌 관한 앎(Knowledge about)이 팽배하다는 것이다. 이런 앎은 갈등과 회복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서로를 더욱더 깊게 이해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관계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된다.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네가 나를 아느냐?” 라는 질문과 동시에 직접 상호관계속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다.  예컨데 아이들이 셋이라면 평상시 아무리 세 아이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더라도 따로 따로 한 아이씩 30분 또는 1시간씩 높은 수준의 시간(Quality time)을 가져야 한다. 많은 이웃과 함께모여 자주 교제를 할지라도 반드시 한 가족씩 따로 시간을 내서 교제하고 상호작용하는 앎(Knowing)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끝났을 때 네가 나를 아느냐?” 질문에 대답할 것을 매일 준비하는 우리가 되야겠다.


한국일보 링크:

아이워드(i-word) (4월 5일 한국일보 칼럼)

결혼전 모 선교 단체에서 훈련 받으며 배운 소중한 것이 있다. 그 배움 덕분에 외향적이고 즉각적인 대화를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는 나와 내성적이고 오랜동안 생각한 후 대화 하는 완전히 반대 성격인 아내와 결혼 후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충돌(Conflict)과 갈등을 서로 상처주지 않고 지혜롭게 해결해왔다. 그것은 바로 아이워드(i-word)를 사용해 대화 해왔기 때문이다.

관계속에 충돌이 생기면, 사람들은 즉각적인 반응(Reaction)과 함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한 대화를 시도하는데 대부분이 유워드(you-word)를 사용한다. “당신(you)이 이러 이러하게 해서 문제다라고 대화 하는 것이다.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대화 시도를 하는것은 매우 건강한 것이지만 유워드를 사용하면 대부분의 경우 논쟁으로 확대 되고 서로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데, “만약 우리가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일은 계속 힘들어지고 희망이 없어질 겁니다. 어떤 것도 제대로 되지 않을것 같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유워드(you, we)를 사용해 이야기 하면 우리라고 표현한 것에 포함된 상대방은 당신이 사실을 조심스럽고 완곡하게 표현한다 해도 당신의 말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와 충돌과 갈등이 생겼을 때, 즉시 아이워드(i-word) 사용모드로 전환해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갈등과 충돌 상황이 생기면, 즉각적인 반응(Reaction) 보다는 잠시 멈춰서 심호흡을 하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선택하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화가 나고 억울해 맥박이 빨라진다면 상대방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멈추고 최소한 15분 또는 한시간 이후 아니면 다음날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것으로 결정해야 한다. 이것을 타임아웃(Time out)이라고 말한다.

타임아웃을 통해 감정이 완화된 후, 하나님 안에서 내 자신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듯 상대방도 그렇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며, 샌드위치 만들듯 상대방의 긍정적인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문제(충돌), 그 다음 긍정적인 것으로 다시 덮는 대화로 마쳐야 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문제(충돌)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아이워드(i-word)를 사용해야만 한다. 예컨데,  (i)는 이 일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고, 또 제(i)가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듯 느낍니다.  왜냐하면 저(i)는 어떤것은 잘 이해를 못하겠고 누군가에게 그것에 관해 질문을 하고 싶지만 제(i)가 느끼기엔 모두 바쁘신것 같아 제(i)가 질문을 하면 방해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와 같이 아이워드를 사용하면, 그 표현은 내 개인의 의견, 내 관점이 되어서, 상대방은 방어적이지 않고 쉽게 해결책을 가지고 당신과의 대화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아이워드(i-word)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 표현은 마치 상대방은 동의하지 않거나 상처 받을 수 있는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된다.
아이워드 사용과 동시에 대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반사적 듣기 (Reflective listening) 를 해야한다.  반사적 듣기는 아주 조심스럽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상대방이 이야기한 것을 내 입으로 반복하거나 요약해서 이러 이러하게 이야기 한것이 맞죠?” 라고 질문함으로써 당신이 제대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점검할 수 있다.

이때, 아이워드(i-word)를 사용해 대화할 때 반드시 피해야할 것 네가지가 있다.

첫째,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닌 과격한 목소리로 말해서는 안된다.
둘째, 상대방의 잘못된 것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듯 자기를 높여서는 안된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무례함과 합쳐지면 틀린것, 옳지 않은것이 된다.
셋째, “그래 맞아(yes)…그런데 말야(but)… “ 표현을 피해야만 한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고, 당신이 말하고 싶은것만 생각 했다는 것이다.
넷째, 항상, 언제나 (Always), 결코, 전혀 (never)라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이런 표현은 즉시 논쟁을 유발한다. 예컨데, “너는 언제나 한 15분씩 늦었어…” “너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아…”


아이워드(i-word) 대화법을 통해 건강한 갈등 해결을 경험하는 즐거운 인생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한국일보 링크:

커뮤니케이션 (3월 22일 한국일보 칼럼)

(Speaking) 잘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時代). 지면(紙面)이나 인터넷 온라인을 채우는 활자화된 말뿐만아니라 입 밖으로 소리를 내서 논리정연하고 유려(流麗)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수 있다. 더군다나 인터넷 범용화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정보 접근성을 갖게 되면서 말은 근거의 힘까지 갖춘 유창함이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말 잘하고 대화를 자주 나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가장 가까운 남편 또는 아내로부터 시작해 친구, 직장 동료와 상사, 더 나아가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속에서 소통(疏通)의 장벽을 경험하곤 한다. 함께하는 시간도 많고 대화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통의 충돌이 지속되면 서로 관계가 깨지고 상처를 주거나 극단적으로는 공동체가 분리되고 파괴되기까지 한다. 말 잘하는 사람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말을 잘한다’ 또는 ‘대화를 많이 한다’는 것의 실체를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면, 대부분 말을 통해 나온 정보의 양과 대화에 사용된 시간과 상관없이 그것이 ‘일방적’일 때 소통의 장벽을 경험하고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방적 이라는 것은 그 대화속에 소통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소통(疏通)이라는 말이‘서로 막힘 없이 통하는 것’ 즉, 상호성과 양방향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소통은 단순히 말을 잘하고 무의식적으로 듣는(Speaking and hearing)것이 아닌, 의식적으로 결정해 적극적으로 듣는(listening) 행위를 내포한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4세기 후반 라틴어에 뿌리를 둔, 이‘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말은 ‘나누다(To share), ‘하나되다(Unite), 그리고 ‘공통되다(Common)’ 라는 단체성의 옷을 입고있다. 그래서 언어 학자들은 ‘공동체(community)’라는 단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구성원들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무형의 끈을 사용해 공통됨을 공유하고, 나누고, 하나되어 공동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 커뮤니케이션이 없는곳엔 공동체(community)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말 잘하는 사람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이 없는 작은 공동체인 부부, 부모와 자녀, 친구 관계로부터 시작해 큰 공동체인, 직장과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 이르기까지 소통(疏通)의 장벽으로인해 서로 이해할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관계가 깨지고 상처를 주거나 극단적으로는 공동체가 분리되고 파괴되기까지 하는것이다.
                         

일상에서 이렇게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은 가장 먼저 적극적 듣기(Active listening)를 통해 남편과 아내, 친구와 직장 상사, 공동체 구성원들을 친밀하고 깊게 연결(Connected) 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것을 기반으로 형성된 상호간의 깊은 신뢰가 적극적 나눔과 하나됨의 정신으로 버무려져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공동체(Community)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동체 속에서 개인은 소속감과 안전감(Security)을 갖게되며 그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외부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상호 건강한 커뮤니케이션을 공유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배워 자신이 속한 관계속에서 영적, 육적, 지적, 사회적으로 건강한 커뮤니케이션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가족 구성원들이 모인 사회 공동체와 믿음 공동체는 서로 나누고 하나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내가 속한 가장 작고 가까운 공동체인 부부관계로부터 시작해, 부모와 자녀, 친구, 직장, 교회에 이르기까지 관계가 깨지고 서로 상처를 주며 마치 거대한 장벽앞에 서있는듯 갈등과 반목의 상황에 처해 있다면, 즉시 자신이 말을 하고 있는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할 것이다.

한국일보 링크: 


Thursday, March 24, 2016

종합시험과 논문 준비

2015년 가을에 끝냈어야할 종합시험과 논문 제안을 넷째 아이 출산, POP Chicago 집회 준비, 장모님 소천 이후 힘들어 하는 아내를 돌보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느라 미루었었습니다. 이제 2016년 5월 꽉찬 4년를 향하며 종합시험과 논문 제안 준비를 하면서 집중해 많은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Critical reading and thinking 을 통해 읽은 책들이 모두 잘 소화되어 열매 맺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젊은 나이에 공부를 마치고 엔지니어로 살거나 아니면 진작 목회를 할수도 있었지만 선교사로 인도(India)에 가서 8년간 기쁨으로 선교 사역할 수 있게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또한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꽤 늦은 나이에 미련하게 공부를 하지만 하나님께서 등을 떠밀어 문을 열어 공부 시키시고 계속 이끌어 가시는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물론 모든 불평을 다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 아멘.

by YKKim

Thursday, March 17, 2016

장미 화원 (시카고 한국일보 3월 15일자 칼럼)

오랜만에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보타닉 가든(Botanic Gardens)에 콧바람을 쐬러 갔다. 일상의 속도감으로부터 잠시나마 이탈해 느린 호흡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곳이 보타닉 가든이다.

매년 수많은 꽃들과 초록의 향연속에 화려한 계절옷을 입고있던 모습과는 달리, 아직도 쌀쌀한 겨울 끝자락에 방문한 보타닉 가든은 여느 촌부(村婦)처럼 화장기 없는 얼굴로 짙고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발 끝은 습관처럼 장미 화원(Rose garden)으로 향했다. 장미 화원 또한 긴 시카고의 겨울을 지나온 흔적이 역력했다. 지난 가을에 보았던 백장미, 붉은 장미, 그리고 노란 장미 꽃들이 화려하게 춤 추던 자리엔 짧게 가지치기된 장미 나무들의 몸통만 남아 있었다. 마치, 신데렐라가 왕자와 춤을 추다 자정이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평상시 허름하고 숱검뎅 뭍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과 같았다. 볼품없고 짧은 몸통만 남아있는 장미 화원(Rose garden)의 모든 장미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여전히 아름답고 고운 신데렐라처럼 그 우아함과 자존심을 잃지 않고 꼿꼿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또한 턱밑까지 두툼하게 채우고 있는 시커먼 퇴비속에서 오롯이 봄을 준비하고 있는 짧은 키의 장미나무 가지들은 차분하고 성숙하게 그리고 인내함으로 진한 향기의 꽃망울을 그 안에 품고 있었다. 길고 모진 겨울을 통과하는 동안 겉으로 보기엔 꽃인지, 잡풀인지, 나무인지, 어떤 존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단 한 순간도 장미 화원 (Rose garden)의 주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거나 자존심을 놓아 버리는 천박함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커멓고 냄새나는 퇴비들을 보고 동네 방네 쏘다니며 불평하거나 폄하하며 쓴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환경이 자신을 강하고 크게 만드는 자양분이 됨을 믿고 감사함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장미 화원 (Rose garden)을 지켜온 장미들은 춥고 고단한 시카고의 겨울이 반드시 끝날것을 오랜 경험과 믿음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앙상한 장미 나무 가지들은 겨울 내내 푸른 잎사귀와 진한 향기의 꽃들로 내면을 채우며 열정적으로 자신의 향기를 뿜어내며 춤을 출 봄을 꿈꾸고 희망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있는 것이리라.


4월엔 키작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올곧게 우아한 향기와 믿음의 꽃을 품고 있는 장미 나무들이 준비한 파티에서 함께 춤을 출것이다.

by YKKim

Saturday, October 10, 2015

성경읽기와 메타인지(Meta-cognition)

한국에서 살아본적이 없는 아이들은 영어가 모국어처럼 돼 버렸지만 언어적 은사가 남다른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한국말도 정말 잘한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한글 성경의 이야기 한 장을 크게 소리내서 30분간 읽고 내게 와서 요약을 해준다.

성경의 긴 이야기 한 장을 자신의 언어적 표현으로 짧게 정리해 아빠와 엄마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말해주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메타인지(Meta-cognition) 훈련을 하게 된다.

첫째와 둘째가 경쟁적으로 한글 성경 읽기를 비롯 매일매일의 독서 습관을 갖게되니 이제 글을 배워가는 셋째 딸 아이도 저절로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6개월된 넷째 지수도 곧 이 일해 동참할것을 상상해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놀라운 토요일이다.

by YKKim

Thursday, January 22, 2015

소중한 것

세월은 쏜 화살보다 빠르고 인생은 너무도 짧다는 이야기를 아내와 나눴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날마다 즐겁고 신나며 기쁘게 그리고 소중하고 작은것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 내자고 아내와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작고 소중한것에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소중한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거나 그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중한 것"은 작든 크든 한번 지나가면 절대 다시 오지 않을뿐만 아니라 나중에 다시 할 수 없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예컨데, 아이들과 눈을 마주보며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이며 보내는 시간, 아내와 대화하며 보내는 시간,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것, 어려움을 통과하고 있는 이웃을 격려하고 함께 교제를 나누는것,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직장에 함께 일하는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몇분간 듣고 동감하는 것,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 그외 수 많은 작고 소중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공부, 학위, 직업, 돈, 명예 등 언제든 다시 할 수도 돌이킬수도, 회복할 수도 있는 것들을, 우리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이들이 "소중한 것" 과 "필요한 것" 의 우선순위를 잊고 삽니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고 그리고 "필요한 것"에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물론, 둘중에 하나를 선택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기꺼이 "소중한 것"을 먼저 선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소중한 것"을 아예 잊어버리고 "필요한 것"에만 모든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성취한듯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균형을 잃어버리고 성취지향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얼마나 수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앞으로도 주게될지 그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그들이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 결과는 더욱더 악화됩니다. 그 열매는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 그리고 아이들에게 나타나고 세대를 거쳐서 확대 재생산 되게 됩니다.

지금 당장, 내 삶의 방식이 "소중한 것" 과 "필요한 것" 의 우선순위와 균형을 잘 이해하고 지켜나가고 있는지 점검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장 돌이켜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소중한 것"은 빛과 같이 당신과 주변의 모든 이들을 지나 영원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것이기 때문입니다.

by YK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