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에게
당신이 뿌려둔 마음들이
자라납니다.
심령 곳곳에 움튼 꿈이
열매를 맺습니다.
천년의 時空을 넘어
지금껏 나를 기다려준 당신을 만나고자 합니다.
얄팍한 것들이 더이상 나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결코 당신을 놓치지 않으렵니다.
거리를 거닐 때
우리는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형상
당신의 사랑
영원한 당신의 꿈 입니다.
靑潭.
Thursday, April 24, 1997
Sunday, October 20, 1996
인상좋은 친구에게
인상좋은 친구에게
멋진 밤이군. 가을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더니 비가 내려
고즈넉하던 밤을 우수에 젖게 만드는 것 같아. 갑작스레 편지를 쓰게된 동기는
후술하기로 하지.
낮 동안에 깨끗이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훔쳐내니
한결 깔끔하더니만, 역시 사내놈의 행실이란 것이 늘 그렇듯 그 새 어지럽혀졌네.
책상은 모니터와 프린터로 자리를 차지해 버려 천상 방바닥에 큰 상을 깔고
책을 보기도 하고 이렇게 편지글을 일구기도 한다네. 방금 커피물을 레인지에
올리고 티스푼도 아닌 밥숟가락으로 커피와 프림을 넣고 자그마치 삼 분이나
수저를 입에 물고 있었지. 역시 다방 커피처럼 독특한 향기를 낼 재주는 없지만
오늘 밤을 부족한 공부로 채우며 보내기엔 꽤 어울리는 것 같아.
흠. 인사가 늦었네. 그간 잘 지내셨나. 언혜와 목하 데이트중
신선한 충격(너무 상투적이지?)으로 만나게된 자네에게 몇 번의 전화를 통한
통신을 시도 했지만 자네의
삶의 방식(물론 자의 인지 타의 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에서 무난하게 통화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라면 이유랄까.
해거름 때가 다가오면 가정의 관습적 강요에 의한 귀가와 가족과의 유대, 손님이
찾아오기전 가모(家母)와 더불어 요리를 만들고, 학교 생활에 충실하고 늘 소속감과
절제의 분위기에서 살고 있는듯한 모습에 사실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
으로 자네에게 미안한 생각마져 들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고백하고 싶네.
무엇보다 자네의 지금까지의 고요한 삶(마치 나르치스같은 느낌)에 내가 끼어들어
핀트가 어긋나거나 자네 고유의 색깔에 다른 색깔을 가감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은 나 스스로를 굉장히 소심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어.
그래서 요 며칠(4일)동안 고심 끝에 조금은 고전적이지만 편지를 통해 자네와
내적 교류를 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는 판단을 내렸어. 서신 자체가 자네의
입지에 조금은 부담을 덜어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인데. 어떤가? 물론 전화를
통한 부모님의 외압보다는 편지라는 문서상의 중립성과 글밭을 일구어서
돋아나는 싹들이 서로에게 -자네에겐 더욱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가교(架橋)가 될것이란 기대 때문이기도 해. 어찌되었든 자네의 삶이 참으로
보기 좋고 부럽다고 할까. 비록 단 한 번의 면대와 몇 마디의 대화였지만
닮고 싶은 점이 많아서 좋아. 정리하자면 서신 교환에 비중을 두고 가끔씩
짬을 내 밝은 시간에 함께 산책도 하고싶고 가끔 영화도 보고, 맥도널드에서
치즈버거도 먹고싶네. 시간이 허락된다면 오랜 시간 편안하고 무난한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야. 벌써 새벽 두시가 돼가는군. 오늘 비로 가을
이 한층 깊어지고 완숙해졌을 법해.
시간이 날 때 답장을 준다면 고맙겠네.
靑潭
멋진 밤이군. 가을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더니 비가 내려
고즈넉하던 밤을 우수에 젖게 만드는 것 같아. 갑작스레 편지를 쓰게된 동기는
후술하기로 하지.
낮 동안에 깨끗이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훔쳐내니
한결 깔끔하더니만, 역시 사내놈의 행실이란 것이 늘 그렇듯 그 새 어지럽혀졌네.
책상은 모니터와 프린터로 자리를 차지해 버려 천상 방바닥에 큰 상을 깔고
책을 보기도 하고 이렇게 편지글을 일구기도 한다네. 방금 커피물을 레인지에
올리고 티스푼도 아닌 밥숟가락으로 커피와 프림을 넣고 자그마치 삼 분이나
수저를 입에 물고 있었지. 역시 다방 커피처럼 독특한 향기를 낼 재주는 없지만
오늘 밤을 부족한 공부로 채우며 보내기엔 꽤 어울리는 것 같아.
흠. 인사가 늦었네. 그간 잘 지내셨나. 언혜와 목하 데이트중
신선한 충격(너무 상투적이지?)으로 만나게된 자네에게 몇 번의 전화를 통한
통신을 시도 했지만 자네의
삶의 방식(물론 자의 인지 타의 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에서 무난하게 통화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라면 이유랄까.
해거름 때가 다가오면 가정의 관습적 강요에 의한 귀가와 가족과의 유대, 손님이
찾아오기전 가모(家母)와 더불어 요리를 만들고, 학교 생활에 충실하고 늘 소속감과
절제의 분위기에서 살고 있는듯한 모습에 사실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
으로 자네에게 미안한 생각마져 들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고백하고 싶네.
무엇보다 자네의 지금까지의 고요한 삶(마치 나르치스같은 느낌)에 내가 끼어들어
핀트가 어긋나거나 자네 고유의 색깔에 다른 색깔을 가감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은 나 스스로를 굉장히 소심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어.
그래서 요 며칠(4일)동안 고심 끝에 조금은 고전적이지만 편지를 통해 자네와
내적 교류를 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는 판단을 내렸어. 서신 자체가 자네의
입지에 조금은 부담을 덜어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인데. 어떤가? 물론 전화를
통한 부모님의 외압보다는 편지라는 문서상의 중립성과 글밭을 일구어서
돋아나는 싹들이 서로에게 -자네에겐 더욱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가교(架橋)가 될것이란 기대 때문이기도 해. 어찌되었든 자네의 삶이 참으로
보기 좋고 부럽다고 할까. 비록 단 한 번의 면대와 몇 마디의 대화였지만
닮고 싶은 점이 많아서 좋아. 정리하자면 서신 교환에 비중을 두고 가끔씩
짬을 내 밝은 시간에 함께 산책도 하고싶고 가끔 영화도 보고, 맥도널드에서
치즈버거도 먹고싶네. 시간이 허락된다면 오랜 시간 편안하고 무난한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야. 벌써 새벽 두시가 돼가는군. 오늘 비로 가을
이 한층 깊어지고 완숙해졌을 법해.
시간이 날 때 답장을 준다면 고맙겠네.
靑潭
Wednesday, July 24, 1996
가무(歌舞)에서 비엔나 커피를 마실 때
가무(歌舞)에서 비엔나 커피를 마실 때
자연광을 연하게 만든 창이 있는 가무(歌舞)에서
여름을 내려다 보며 비엔나 커피를 마실 때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 좋습니다
생크림이 입가나 코 끝에 묻곤 하기 때문이죠
커피향을 혀 끝으로 쓸어 내면서
하얀 생크림 웃음을 만들어 보세요
당신 마음에 벤취가 생길겁니다
함께 나오는 팬케익을 잘게 쪼개어
나누어 먹을 때는 창가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또르륵 또르륵 거립니다.
웃을 때마다 하얀 생크림 같은 미소를
가진 당신이 좋습니다.
저는 가무(歌舞)에 가는 길목에서
당신을 만납니다.
그리고 벤취에 함께 앉아
비엔나 커피를 주문하고 싶습니다.
靑潭.
자연광을 연하게 만든 창이 있는 가무(歌舞)에서
여름을 내려다 보며 비엔나 커피를 마실 때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 좋습니다
생크림이 입가나 코 끝에 묻곤 하기 때문이죠
커피향을 혀 끝으로 쓸어 내면서
하얀 생크림 웃음을 만들어 보세요
당신 마음에 벤취가 생길겁니다
함께 나오는 팬케익을 잘게 쪼개어
나누어 먹을 때는 창가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또르륵 또르륵 거립니다.
웃을 때마다 하얀 생크림 같은 미소를
가진 당신이 좋습니다.
저는 가무(歌舞)에 가는 길목에서
당신을 만납니다.
그리고 벤취에 함께 앉아
비엔나 커피를 주문하고 싶습니다.
靑潭.
Wednesday, May 1, 1996
익숙해진 슬픔
황토빛 목장 숲을 지나가면 그곳엔 이슬들의 아침이 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까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마음들일 것이다.
주머니 속에 담아둔 전화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메아리쳐 온다.
나...결혼해...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차 안에선 담배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는
동료들을 가끔 태워준 덕분이라고 웃어넘기며 그녀는 머리칼을 쓸어넘긴다.
하얀 목덜미가 예전보다 더 희게 보인다.
목장을 경계지우고 있는 희나리 등걸 나무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이는
날이다.
매니큐어를 하지 않은 잘 손질된 그녀의 손끝에 카셋트 테잎이 밀려들어간다.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왜 죽은 사람 노래를 듣냐는 질문에 그녀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서 좋다고
한다.
삼십대가 되니 마음이 많이 불안하고 그래.. 음..아이가 크면서
왜 엄마는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아 라고 질문하면 무어라 말해 주어야할지
막막해지는 꿈을 꾸곤 한다고 그녀는 작은 입술을 약간 오무리며 말한다.
훈훈해진 오후의 열기 때문인지 녹기 시작한 질펀한 목장 길목으로
경운기가 털털 거리며 힘겹게 지나간다.
47번 국도를 따라 일동까지 나가 그곳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녀는 마감을 앞두고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전화를
한다. 사무적으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녀가 프라이드를 사고 그것을 몸에 익숙하게 익히는 동안
훈련소에서 받아본 그녀의 또박 또박한 글 들은 이별에 대한 짧은
감흥들이었다. 아마도 그땐 정말로 이별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그녀는 연신 울음을 그치지 못했었다.
우리가 만난지 4년이 흐른 그해 겨울. 제대를 보름 남겨두고
그녀는 동료기자와 결혼을 했다.
그 남자는 그녀보다 2살 연하였다.
가끔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 보다가 두툼하게 쌓여있는
눈덩이 들을 발견하곤 이것이 무엇일까 들쳐보기를 했다.
시간의 열기가 녹여버렸다고 확신하던 옛 기억들이 아직도 쌓여있는것을
보곤 흠칫 놀라곤 했다. 남들이 이야기 하는 사랑의 흔적일까...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익숙해진 슬픔이라는 것이었다.
익숙해진 슬픔..
靑潭.
Sunday, August 20, 1995
소나기
후두둑 후두둑.
조립식 막사의 양철 지붕을 깨우는 여름날의 외침.
아직 대낮인데도 깜깜한 오후다. 식당에서 구보로 뛰어 왔지만 이미 젖을데로 젖어
등짝에 착 달라붙는 전투복이 부담스럽다. 빗속에서의 소란했던 빗방울들이 물감을
흠뻑 먹은듯 다채롭게 보인다.
후두둑 후두둑 메트로놈 진동에서 음률로 변조된다.
식물들 사위로 진한 녹색 단조가. 희나리 등걸에 핀 버섯에선 북소리가. 그리고 유
리창을 때리는 아프페지오와 화성을 이루는 붉은 대지의 안정감. 빗방울과 호흡하는
모든 세계가 교향악을 연주하고 있다. 살풀이라도 하듯 세차게 토해내는 취한 하늘
아래 몇몇의 감상객이 있을까 자못 궁금해 지기도 한다.
12시 30분. 하절기라 1시까지 내무반에 누워 오침중이다.
아홉살 때 였던가. 장마철 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무슨 기념일이라 아침부터
14인치 흑백 TV 앞에서 진을치고 앉아 있었다.
스물 네 해의 감성을 이룬, 황순원 님의 '소나기'가 TV 문학관
타이틀로 방영되었다.
개울가에서 물을 움키며 장난을 치던 소녀. '바보' 라는 한 마디와 조약돌을 뒤로
하고 이유도 없이 내달음치던 소년. 무릎에 생긴 생채기를 보듬던 순수. 맑고 푸른
하늘. 단조로운 흑백의 조화였지만 쏟아붓던 그 굵은 소년의 소나기가 창밖에서도
내렸었다. 소녀가 앓을 때 난 소년이 돼 버렸고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이후 칼라
TV 로 바뀐 후 두번인가 더 보았는데. 두번째 부터는 왠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수염이 한두가닥 자랄 시기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막사 밖에선 굵디 굵은 순수가 곤두박질치며 노래하고 있다.
靑潭
Monday, April 24, 1995
품어내기
낮아지고 작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랑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
사랑이 시들고 미움과 슬픔의 뿌리가 뻗은후
사랑의 고갱이는 붉은 열매를 맺는다.
그 기억의 변증법들은 깊이 깊이 묵혀서
시고 떫음을 지나쳐 본체의 맛과 향이
절로 피어날 때 꺼내야만 한다.
우리는 판도라의 어리석음이다.
어린시절의 취미였다고나 할까. 다른 아이들처럼 골목에서 떠들썩하게
딱지 치기를 하거나 구슬 치기, 땅따먹기를 하기 싫어했다. 어린 눈에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 싫었다. 신문
지나 마분지를 접어 만든 사각형의 딱지에 소유의 즐거움과 착취의
쾌락을 그리고 승부의 본능을 부여해 놀이 하는 것이 영 흥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자치기나 연 날리기, 불장난을 주요 놀이로 삼았다. 그것은
주로 겨울철 놀이였다. 옆집 지붕에 한 뼘 만큼 쌓인 하얀 눈에서 일
요일의 태양을 맞이하고 담요안에 훈훈한 화석 연료의 생기가 가득할
때의 나른함을 좋아했다.
낮엔 깨끗한 사발에 모래를 씻어넣고 동생 녀석의 1호 재산인 유리구
슬 몇 개를 놓는다. 그리고 팔당호에서 공수되온 수돗물을 부어 고요
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골목 녀석들의 엄지와 중지 사이에서 사정없이
던져져 부딪히고 깨지고 상처입어 탁해진 밉살스런 유리알들이 물속
에 넣어지면 깨끗이 아물었다. 그것은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처럼
투명하고 순수함의 절정이었다.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하지만 너그
러움과 그 맑음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누나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되돌아 보니 구슬이 온데 간데 없다. 물과 모래 뿐이
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는 제자리에 있었다. 그는 물보다 유연했
고 빛과 같기도 했다. 내 마음이 희어지고 희어져서 빛이 되면 구슬이
보이고 나쁜 마음을 먹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라 믿었다.
인간의 본능인지 순결의 절정을 보면 교활한 호기심이 동하나 보다.
손을 넣어 눈 앞에 꺼내어 보니 투박한 유리일 뿐이었다. 가슴이 아리
고 슬펐다. 치유와 평화의 끝에 이른 그것을 망가뜨린 자책이었다. 한
편으로 영악한 아이의 눈에 비친 그 현상이 신기한 의문으로 남았다.
물속에 담겨진 유리알의 영롱함이나, 꺼내졌을 때의 그 참담함과 현실
적인 슬픔이라니. 구슬의 모양을 그대로 품으며 순수를 살려내는 물의
너그러움이 내 안에도 있을까 하는 궁금이 있었다.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형태에 흡수되기도 하며 포용하기도 하는, 유리알을 부끄럼 없이
물이 되게하는 그 유연한 모성(母性)이 평화의 궁극이었다. 그리고 그
순리의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이 치유의 정도(正道)임을 깨닫게 했다.
한가지 불변의 고집 이라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방향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보다 큰 포용을 위한 낮아지기였으며 작아짐의 변
증법이었다.
잣나무 침엽 끝에 맺힌 아침 이슬을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뒤에 있던 거대한 산과 하늘이 그 작음속에 들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젠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靑潭...
사랑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
사랑이 시들고 미움과 슬픔의 뿌리가 뻗은후
사랑의 고갱이는 붉은 열매를 맺는다.
그 기억의 변증법들은 깊이 깊이 묵혀서
시고 떫음을 지나쳐 본체의 맛과 향이
절로 피어날 때 꺼내야만 한다.
우리는 판도라의 어리석음이다.
어린시절의 취미였다고나 할까. 다른 아이들처럼 골목에서 떠들썩하게
딱지 치기를 하거나 구슬 치기, 땅따먹기를 하기 싫어했다. 어린 눈에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 싫었다. 신문
지나 마분지를 접어 만든 사각형의 딱지에 소유의 즐거움과 착취의
쾌락을 그리고 승부의 본능을 부여해 놀이 하는 것이 영 흥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자치기나 연 날리기, 불장난을 주요 놀이로 삼았다. 그것은
주로 겨울철 놀이였다. 옆집 지붕에 한 뼘 만큼 쌓인 하얀 눈에서 일
요일의 태양을 맞이하고 담요안에 훈훈한 화석 연료의 생기가 가득할
때의 나른함을 좋아했다.
낮엔 깨끗한 사발에 모래를 씻어넣고 동생 녀석의 1호 재산인 유리구
슬 몇 개를 놓는다. 그리고 팔당호에서 공수되온 수돗물을 부어 고요
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골목 녀석들의 엄지와 중지 사이에서 사정없이
던져져 부딪히고 깨지고 상처입어 탁해진 밉살스런 유리알들이 물속
에 넣어지면 깨끗이 아물었다. 그것은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처럼
투명하고 순수함의 절정이었다.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하지만 너그
러움과 그 맑음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누나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되돌아 보니 구슬이 온데 간데 없다. 물과 모래 뿐이
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는 제자리에 있었다. 그는 물보다 유연했
고 빛과 같기도 했다. 내 마음이 희어지고 희어져서 빛이 되면 구슬이
보이고 나쁜 마음을 먹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라 믿었다.
인간의 본능인지 순결의 절정을 보면 교활한 호기심이 동하나 보다.
손을 넣어 눈 앞에 꺼내어 보니 투박한 유리일 뿐이었다. 가슴이 아리
고 슬펐다. 치유와 평화의 끝에 이른 그것을 망가뜨린 자책이었다. 한
편으로 영악한 아이의 눈에 비친 그 현상이 신기한 의문으로 남았다.
물속에 담겨진 유리알의 영롱함이나, 꺼내졌을 때의 그 참담함과 현실
적인 슬픔이라니. 구슬의 모양을 그대로 품으며 순수를 살려내는 물의
너그러움이 내 안에도 있을까 하는 궁금이 있었다.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형태에 흡수되기도 하며 포용하기도 하는, 유리알을 부끄럼 없이
물이 되게하는 그 유연한 모성(母性)이 평화의 궁극이었다. 그리고 그
순리의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이 치유의 정도(正道)임을 깨닫게 했다.
한가지 불변의 고집 이라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방향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보다 큰 포용을 위한 낮아지기였으며 작아짐의 변
증법이었다.
잣나무 침엽 끝에 맺힌 아침 이슬을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뒤에 있던 거대한 산과 하늘이 그 작음속에 들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젠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靑潭...
Monday, October 24, 1994
레옹, 그 사랑의 끝에서
"ok" "ok" "ok" , "움직임을 함께 느껴", 주변보다 더 짙고 어두운 옷을 입어야해", "자 숨을 멈춰", "레옹, 이곳에 뿌리내려 함께 살아요."
사내녀석들의 땀 냄새로 가득한 내무반 붙박이 벽에 놓인 VTR 은 Play 발광 다이오드를 빨갛게 치뜨고 있다. 화면이 지날 때마다 TV 에 집중해 있는 병사들의 턱을 괸 얼굴들이 무표정하게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한다.
영화 레인맨에서의 더스틴 호프만을 연상케한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던 장르노가 연기한 레옹과 와일드 오키드의 여주인공 -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 이미지의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마틸다.
마틸다의 색깔은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와 비슷했다. 관심밖의 영역에서 그저 바라보고, 가끔 심하다 싶을 만큼 매 맞기도하는 그 나이의 아이들이 가질 순수함과 발랄함은 기저에 억눌려 감추어져있고 영악한 눈빛과 악바리같은 어리광, 예민한 감수성등이 그녀에게 강한 흡인력을 가진 눈을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카메라 앵글이 마틸다의 실루엣을 화면 가득 담고 있을 때 그녀의 코와 입술은 깎아 놓은듯 아름다웠다. Fade-in 되면서 클로즈업 된 긴 속눈썹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만감(萬感)의 메시지를 주는 눈동자 - 사실 마틸다의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어린 소녀같은 발랄함, 장난끼를 동시에 풍기는 야누스적 원천은 그녀의 눈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레옹의 그것과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강렬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클리너"는 레옹 신드롬으로 익숙해진 - 킬러보다 예리하면서 인간미가 진하 게 묻어나는 언어이다. 성격파 배우들의 공통점이라면 헐리우드 스크린의 판에 박힌 잘생긴 배우들과는 달리 눈이 움푹 들어가 있거나 윤곽이 샤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데 양들의침묵의 앤소니 홉킨스, 25시의 앤소니 퀸,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 미저리와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 캐시 베이츠, 사랑과 영혼, 싸라피나, 만델라, 그리고 씨스터 액트에서 열연했던 우피 골드버그 등이 이러한 특징을 공유한 한부류에 속하며 장 르노의 레옹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무표정하게 툭 불거져 나온 조금 충혈된 눈은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습관적으로 창문과 환풍 통로, 가구의 배치, 출입문 위치 등 전체적인 구조를 탐색하고 꼭 커튼을 두른다. 군밤 장사 아저씨같은 윤곽에 냉정하고 말이 적은 - 프로페셔널다운 진화된 행동방식 그러나 그 속에서 배어 나오는 진한 인간미와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과 절제는 신(神)의 강제된 선물인 사랑에 의해 해리되고 어찌보면 상투적인 이야기처럼 사랑과 피, 카타스트로프(Catastrophe)의 랑데부를 보여준다. 종국에 관객에게 남기는것은 늘 그렇듯 사랑과 정의, 평화의 여운이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 해석이라 대중적 느낌인지 확인한바 없다.
90년대 들어 본 영화는 대부분 상당히 난해한 것들이었다.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감독들의 다크 파스텔 톤 화면 구성은 그 앵글이 과격하거나 성(性) 모랄 박스(Culture)의 보수주의를 겨냥 했거나 정신분석적 심리학, 심지어 소품의 색깔과 빛의 분산에 의한 관객의 뇌포(腦胞) 반응 까지도 계산한 신중한 것들이었다. 그런 배경 때문에 레옹의 컷트마다 숨어있는 메시지를 읽어 내려고 오감(五感)을 동원하는 정성을 기울였지만 지극히 주관적 스키마의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다.
덕분에 뤽 베송 감독은 충분히 슬펐을(?) 것이다. 착각 이었는지 모르지만 잠깐 비춘 절제된 생활과 고독감의 결투 외에는 특별한 갈등의 피크는 느끼지 못했다.
레옹과 마틸다를 줄곧 휘감고 있던 분말처럼 부서지는 창가의 햇살과 화분. '햇살'은 아마도 레옹에게 자양분이 된 마틸다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 - 장 르노는 우유만을 주식으로 했는데 모성애(母性愛)에 대한 반동형성 또는 애정 결핍에 의한 일종의 시위(Demonstration) 를 표명하며, 마틸다와의 첫 모멘트(Moment)는 그녀가 우유를 사다주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
'뿌리 없는 화분'은 클리너로서의 고독감, 인간관계의 단절, 약간은 편집적인 - 자신이 머무는 곳의 모든것을 탐색하는 - 레옹의 자아상을 대변하는 오브제로 사용된 듯 하다.
즉, 마틸다 = 모성(母性) = 우유 = 햇살 이며, 레옹 = 뿌리없는 화분 = 고독 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둘다 정에 굶주려 있다는 점에선 공통으로 적용된다.(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혀두고 싶다)
매개로 등장한 악당(?) 들과의 투쟁과 마틸다를 탈출 시키는 레옹의 모습은 뿌리없는 화분에서의 몸부림 이었고 "레옹 이곳에 뿌리 내려 우리 함께 살아요" 라는 마틸다의 마지막 대사로 그의 몸부림과 고독과의 투쟁은 끝이났다.
군에 입대후 2년여 동안 정말 보고싶은 많은 영화가 나왔었다. 그러나 휴가 때 본 '너에게 나를...', '세가지색 中 Red', '쉰들러 리스트' 외에는 전혀 스크린 문화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중대 내무반에서 VTR 을 통해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주어져 너무나 기쁘다.
지난 외박 때 '포레스트 검프'와 이번의 '레옹'은 전체 스토리는 단조로운듯 했지만 군 복무에 여념이 없는 우리들에겐 많은 감동과 여운을 남겨
주었다.
靑潭...
사내녀석들의 땀 냄새로 가득한 내무반 붙박이 벽에 놓인 VTR 은 Play 발광 다이오드를 빨갛게 치뜨고 있다. 화면이 지날 때마다 TV 에 집중해 있는 병사들의 턱을 괸 얼굴들이 무표정하게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한다.
영화 레인맨에서의 더스틴 호프만을 연상케한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던 장르노가 연기한 레옹과 와일드 오키드의 여주인공 -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 이미지의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마틸다.
마틸다의 색깔은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와 비슷했다. 관심밖의 영역에서 그저 바라보고, 가끔 심하다 싶을 만큼 매 맞기도하는 그 나이의 아이들이 가질 순수함과 발랄함은 기저에 억눌려 감추어져있고 영악한 눈빛과 악바리같은 어리광, 예민한 감수성등이 그녀에게 강한 흡인력을 가진 눈을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카메라 앵글이 마틸다의 실루엣을 화면 가득 담고 있을 때 그녀의 코와 입술은 깎아 놓은듯 아름다웠다. Fade-in 되면서 클로즈업 된 긴 속눈썹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만감(萬感)의 메시지를 주는 눈동자 - 사실 마틸다의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어린 소녀같은 발랄함, 장난끼를 동시에 풍기는 야누스적 원천은 그녀의 눈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레옹의 그것과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강렬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클리너"는 레옹 신드롬으로 익숙해진 - 킬러보다 예리하면서 인간미가 진하 게 묻어나는 언어이다. 성격파 배우들의 공통점이라면 헐리우드 스크린의 판에 박힌 잘생긴 배우들과는 달리 눈이 움푹 들어가 있거나 윤곽이 샤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데 양들의침묵의 앤소니 홉킨스, 25시의 앤소니 퀸,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 미저리와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 캐시 베이츠, 사랑과 영혼, 싸라피나, 만델라, 그리고 씨스터 액트에서 열연했던 우피 골드버그 등이 이러한 특징을 공유한 한부류에 속하며 장 르노의 레옹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무표정하게 툭 불거져 나온 조금 충혈된 눈은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습관적으로 창문과 환풍 통로, 가구의 배치, 출입문 위치 등 전체적인 구조를 탐색하고 꼭 커튼을 두른다. 군밤 장사 아저씨같은 윤곽에 냉정하고 말이 적은 - 프로페셔널다운 진화된 행동방식 그러나 그 속에서 배어 나오는 진한 인간미와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과 절제는 신(神)의 강제된 선물인 사랑에 의해 해리되고 어찌보면 상투적인 이야기처럼 사랑과 피, 카타스트로프(Catastrophe)의 랑데부를 보여준다. 종국에 관객에게 남기는것은 늘 그렇듯 사랑과 정의, 평화의 여운이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 해석이라 대중적 느낌인지 확인한바 없다.
90년대 들어 본 영화는 대부분 상당히 난해한 것들이었다.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감독들의 다크 파스텔 톤 화면 구성은 그 앵글이 과격하거나 성(性) 모랄 박스(Culture)의 보수주의를 겨냥 했거나 정신분석적 심리학, 심지어 소품의 색깔과 빛의 분산에 의한 관객의 뇌포(腦胞) 반응 까지도 계산한 신중한 것들이었다. 그런 배경 때문에 레옹의 컷트마다 숨어있는 메시지를 읽어 내려고 오감(五感)을 동원하는 정성을 기울였지만 지극히 주관적 스키마의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다.
덕분에 뤽 베송 감독은 충분히 슬펐을(?) 것이다. 착각 이었는지 모르지만 잠깐 비춘 절제된 생활과 고독감의 결투 외에는 특별한 갈등의 피크는 느끼지 못했다.
레옹과 마틸다를 줄곧 휘감고 있던 분말처럼 부서지는 창가의 햇살과 화분. '햇살'은 아마도 레옹에게 자양분이 된 마틸다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 - 장 르노는 우유만을 주식으로 했는데 모성애(母性愛)에 대한 반동형성 또는 애정 결핍에 의한 일종의 시위(Demonstration) 를 표명하며, 마틸다와의 첫 모멘트(Moment)는 그녀가 우유를 사다주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
'뿌리 없는 화분'은 클리너로서의 고독감, 인간관계의 단절, 약간은 편집적인 - 자신이 머무는 곳의 모든것을 탐색하는 - 레옹의 자아상을 대변하는 오브제로 사용된 듯 하다.
즉, 마틸다 = 모성(母性) = 우유 = 햇살 이며, 레옹 = 뿌리없는 화분 = 고독 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둘다 정에 굶주려 있다는 점에선 공통으로 적용된다.(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혀두고 싶다)
매개로 등장한 악당(?) 들과의 투쟁과 마틸다를 탈출 시키는 레옹의 모습은 뿌리없는 화분에서의 몸부림 이었고 "레옹 이곳에 뿌리 내려 우리 함께 살아요" 라는 마틸다의 마지막 대사로 그의 몸부림과 고독과의 투쟁은 끝이났다.
군에 입대후 2년여 동안 정말 보고싶은 많은 영화가 나왔었다. 그러나 휴가 때 본 '너에게 나를...', '세가지색 中 Red', '쉰들러 리스트' 외에는 전혀 스크린 문화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중대 내무반에서 VTR 을 통해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주어져 너무나 기쁘다.
지난 외박 때 '포레스트 검프'와 이번의 '레옹'은 전체 스토리는 단조로운듯 했지만 군 복무에 여념이 없는 우리들에겐 많은 감동과 여운을 남겨
주었다.
靑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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